반응형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024 사이고 다카모리의 경천애인 그리고 세한도 메이지유신의 소위 유신삼걸이라는 인물 중에 사이고 다카모리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남긴 유묵 중에 경천애인이라 쓴 것이 유독 유명한데 이 자는 어렸을 때부터 유학에 단련된 사람으로 그 인품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일본에는 있다. 특히 그가 선동한 소위 서남전쟁은 전통적 사무라이 계층의 복고취향으로 이 경천애인이라는 유묵은 여기저기 사이고와 관련된 유적지라면 많이 새기고 복사하고 해서 전시해 놓았다. 경천애인이라는 문구는 사실 유학자라면 다 아는 이야기라 새로울 것이 없다. 유학의 axiom이라 할 것이다. 경천애인이라고 쓴 저 붓글씨도 필자는 이에 대한 조예가 없어 모르겠지만 저 글씨의 가치는 붓글씨의 예술적 각도에서 조망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이고라는 사람의 인생이 있고 그 인생 아래에서.. 2024. 7. 20. 사고 팔던 사무라이 일본은 웬만하면 자기쪽 누가 될 만한 소리는 잘들 안하다 보니 막말 유신기의 일본의 정황에 대해 굉장히 과장하고 미화한 경향이 있다. 우선 막말이 되면 각 번마다 재정 상태가 안좋아져 중-하급 사무라이, 성을 쓰고 칼 두 자루 차는 자격 정도는 돈 받고 팔았다. 따라서 좀 먹고사는 농민이나 상인은 이 권리를 사서 사무라이가 되는 경우가 있었으니, 잘 아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집안이 이런 경우다. 이 집안 본가는 상인인데 무사가 되었다, 이렇게 두리 뭉실하게 적어놨는데 돈주고 샀을 것이다.에도시대 후반으로 오면 사무라이 신분은 돈주고 사고 팔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좀 먹고 사는 농민들 중에는 격검 도장도 나가고, 칼도 차면서 사무라이 흉내내는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 2024. 7. 20. 개나 소나 떠들던 근왕양이勤王攘夷 메이지유신 전야에 근왕양이勤王攘夷[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는 하나의 유행이었다. 시바료타료司馬遼太郎[1923~1996] 소설을 보면 근왕양이의 열풍에 들뜬 젊은이들이 너도 나도 탈번脫藩하여 쿄토로 상경하는 모습을 자못 감동스런 필체로 묘사하는데 이와는 다른 장면을 전하는 책도 있다. 근왕양이는 그냥 구실이고 사실 실상은 막말幕末이 되면 하층 사무라이들은 녹봉으로 도저히 연명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먹고 살 수가 없어 탈번하는 자가 수두룩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탈번한 이들은 우리나라 70년대 무작정 상경하듯이 쿄토로 향하고 이들이 모여 근왕양이를 부르짖으며 나대기 시작하니 치안이 불안해져 동원된 무력조직이 바로 신센구미新選組다. 웃기는 건 이렇게 동원된 신센구미도 탈번 낭인 浪人부랑자 조직이었다는 점이.. 2024. 7. 20. 메이지유신은 누가 감행했는가 메이지유신에 대한 각종 사설 영화를 보다 보면 무슨 일본의 사무라이가 들고 일어나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것처럼 해놓은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을 이야기 하자면 막번체제를 지탱한 시스템 구성원이었던 제대로 된 사무라이들은 메이지유신 때 쳐맞고 쫒겨다니기 바빴다. 메이지유신 주체는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던 하급무사와 먹고 살만해서 칼 두 개 차고 사무라이 흉내내던 부농 자제들로 이들이 막번체제를 타도하고 신일본을 세웠다. 이 메이지유신 주체는 한국으로 보자면 중인과 잔반계급이다. 동학혁명에 많은 중인, 잔반계급이 참여했는데 이들이 만약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메이지유신에 참여했을 것이다. 막번체제하에서 양성된 제대로 된 사무라이 태반은 메이지유신 하에서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조선왕조가 오백년을 심혈을 기울.. 2024. 7. 20. 이순신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를 다시 보며 일전에 소개한 적 있는 이순신의 북방 전투를 그린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다. 이 수책거적도를 다시 보면, 이 그림 주인공은 여진족도, 이를 방어하는 조선군도 아니고바로 뒤편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는 조선의 농부다. 성채 바깥에 펼쳐진 밭인지 논인지 이는 보는 시각에 따라 병사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둔전일 수도 있겠지만 병사가 이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구한말에는 심지어는 이런 군대의 보호없이도 농민들이 두만강을 넘어 청의 봉금封禁 지역으로 몰래 들어가 농사를 지었다. 농부는 땅을 갈아 먹고 살 수 있다면 어디든 간다. 고려시대 후기 오면서 이 땅에서 마침내 혼합농경이 안정적으로 경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북방 사민의 성공인데, 여기서 병사의 전투와 정치적 포석은사실 이 북.. 2024. 7. 19. 신라통일 이후 북벌은 혼합농경 북상의 역사 앞에서 우리나라 잡곡과 도작은 기원을 달리하여 요서에서 남만주를 거쳐 들어온 잡곡과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온 도작이 만나서 도작과 잡곡이 어우러진 혼합농경이 성립된 곳은 아마도 평양과 황해도 일대 서북지역일 것이라 하였다. 이 혼합농경이 더욱 남하하여 이루어진 판도가 세형동검문화와 얼추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한다. 따지고 보면 대략 고려의 천리장성 정도가 바로 혼합농경의 북방경계였을 것이라 보는데, 윤관정벌과 공민왕의 북벌, 세종대의 북벌 등은 모두 바로 이러한 혼합농경의 북벌과 궤를 같이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윤관북벌 이후 우리나라 함경도 지역의 식민은 농업 기술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아래 지도를 보면 알수 있다. 삼국시대-고분시대 도작이 도달할 수 있는 위도는 북위 40도.. 2024. 7. 19. 이전 1 ··· 48 49 50 51 52 53 54 ··· 338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