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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708

지리한 도덕 훈시로 나열한 최승로 시무 28조, 역사는 왜 그것을 전재했울까? 문제의 최승로 시무 28조 혹은 28책은 대서특필되어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문을 수록했으니, 기전체인 전자는 그의 열전에서, 편년체인 후자는 그가 이를 제출한 성종 원년 982년 6월 항목에다가 전문을 실었다. 나는 모든 기록을 대할 적에 그것을 왜 편찬자들이 적었을까를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말을 계속 주장한다. 고려사 편찬자들은 왜 이를 시시콜콜히 적었을까? 나는 그것을 궁구하는 과정이 고려사를 편찬한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는 길이라고 본다. 이는 최승로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록하는 고려사 사관들한테 중요했던 것이다. 최승로 본인이야 그걸 정리한다고 생똥을 쌌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 시무 28조를 문제작으로 그가 생각했겠는가는 별개 문제라 본다. 그건 관계없다. 우.. 2024. 2. 5.
쥐어 뜯겨 겨우 남은 고려사, 이른바 최승로 시무 28책(1) 앞서 우리는 거란 침입, 특히 이른바 제2차 고려거란전쟁에 개경이 함락당하면서 실록까지 몽땅 불타버렸고, 그렇게 망실한 그 시대 역사를 왕명을 받들어 황주량이 겨우 기워 놓은 것이 지금의 목종 이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전반기 기록이며, 그런 까닭에 부실하기 짝이 없음을 보았다. 그 시기 일어난 일 중에 그 유명한 이른바 최승로 시무 28조 상서上書가 있으니, 이 역시 딱 그에 해당하는 다 뜯어먹기고는 겨우 남은 흔적에 지나지 아니한다. 이 시무 28조는 고려사에서는 대서특필하거니와, 한마디로 국가 경영책이라, 조선시대 이와 비견하는 방책이 율곡 이이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다. 최승로 이 시무책을 생각할 적에 먼저 고려해야 하는 사실은 이는 그가 자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임금의 부름에 응답한 .. 2024. 2. 5.
강감찬과 최항, 경운기 vs. 페라리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종합하면 강감찬은 성종 2년(983) 12월 연말에 실시된 특별전형에 합격해 등단한다. 절요 이 시점 기록을 보면 왕이 진사進士를 뽑으라는 명령이 있음에 따라 실시된 이 시험에는 왕이 직접 임헌臨軒하여 복시覆試를 실시하고는 강은천姜殷川을 비롯한 세 명과 명경明經 1명을 급제케 했다고 하면서 복시를 치르는 일이 이때 시작했다고 한다. 강은천이 바로 강감찬姜邯贊의 본래 이름이다. 이 일이 고려사 권73 지志 권 제27 선거選擧에는 좀 더 자세히 보이는데 정광正匡 최승로崔承老와 좌집정左執政 이몽유李夢游, 병관어사兵官御事 유언유劉彦儒, 좌승左丞 노혁盧奕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왕께서 복시覆試를 보시어 갑과甲科 강은천姜殷川, 을과乙科 2명, 명경업明經業 1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고 했으니.. 2024. 2. 5.
초고속 승진 가도 달린 최항, 이삼십대에 이미 지공거 최언위 손자인 최항崔沆이 역사 전면에 등장한 시점은 고려 성종成宗 10년(991)이라, 이해는 윤달이 끼어 그 윤2월에 실시된 과거시험에 그가 급제해 등단한 것이다. 고려사 그의 열전에는 이때 나이 20세로 갑과甲科에 급제했다 했으니, 972년, 광종 23년에 태어났다. 20세 등과는 상당히 빨랐으니, 서희 역시 이 나이인가 더 빨리 등단했으니, 할아버지 아버지 위광이 있었다 해도, 대단한 재능을 발휘한 천재임을 엿본다. 유의할 점은 그는 77세로 장수한 할아버지 최언위 얼굴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앞서 보았듯이 최언위는 이미 944년 사망한 것이다. 이는 마흔두살 다 늙어서 고려로 귀환한 최언위가 귀국 뒤에 새 장가를 갔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어린 놈이 잘나서 이뻤는지 성종은 우습유 지제고右拾遺 .. 2024. 2. 4.
기구한 인생을 산 최언위 네 아들, 국제 이산가족 작금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고려 조정 신료 중에 최항崔沆(?~1024)이라는 이가 있어 꽤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온다. 그가 바로 최언위 손자다. 그의 아버지가 최광원崔光遠인데 최언위 셋째 아들로 그의 아들 중에서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아 생전에 관직이 비서소감秘書少監까지 이르렀다. 맏아들 최광윤崔光胤은 아버지처럼 일찍이 아버지와 비슷한 코스를 걸어 빈공진사賓貢進士로 후진後晉936년~946)에 가서 유학했지만 인생이 꼬이고 말았다. 후진을 침략한 거란에게 사로잡혀 거기서 벼슬살이를 한 것이다. 귀성龜城이란 데로 사신으로 갔다가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려는 것을 알고 글을 써서 번인蕃에게 부탁하여 알렸다 했으니 이 일로 고려가 군사 30만을 뽑아 광군光軍을 조직하게 된다. 둘째 최행귀崔行歸는 북쪽.. 2024. 2. 4.
"신라를 악의적으로 헐뜯고자 한 위작" 1989년의 화랑세기 가짜론 임창순 "화랑들의 활동이나 화랑도의 성격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군음 혼음 관계를 중점적으로 서술한 이 필사본의 내용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인용한 것과도 크게 다를 뿐더러 사람의 성격 묘사 등이 마치 문학작품에서처럼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점으로 보아 후대의 사람이 신라사회를 헐뜯기 위해 쓴 악의에 찬 위작으로 보인다" "자체와 사용되고 있는 용어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당시의 것들이라 하기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고 더구나 이것들이 일본의 사료들에 나타나고 있는 특징들과 많이 닮아 있어 위작이라도 우리나라 사람이 행한 것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필사본의 출처가 불명확한 점도 위작일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것" "이 사료가 진품일 경우 신라시대의 역사가 완전.. 2024.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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