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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발광(發狂), 그 유래에 대하여 미친 상태, 혹은 혼수상태에 가까운 실성을 흔히 발광이라고 하거니와 그 이른 시기 사용례는 《노자도덕경》에 보인다. 왕필주 현행 통용본 제12장에 일렀다. “五色令人目盲, 五音令人耳聾, 五味令人口爽, 馳騁畋獵令人心發狂”(다섯 가지 색은 사람 눈을 어둡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는 사람 귀를 멀게 하며 다섯 가지 맛은 사람 입을 맛들이고 말달리며 사냥질은 사람 마음을 미치게 만든다)
조경(造景)의 탄생 2005.03.15 09:35:43 조경(造景)이란 글자 그대로는 경관을 만든다는 말. 이 말이 한국에 등장해 광범위화한 것은 1970년 청와대 어느 회의에서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한다. 청와대 조경담방비서관(1972-79)으로 초빙된 오휘영 박사 증언에 의하면 오박사가 1970년 잠시 귀국했을 때 청와대에서 행한 브리핑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서울공대 건축공학과 윤정섭 교수의 자문을 받은 결과물이라고 했다. (오휘영, '우리나라 근대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1)', 141호 48-51쪽.) 이 조경이라는 말은 서양의 landscape architecture를 옮긴 것이다. 하지만 이 랜드스케이프 아키텍쳐라는 말도 그 역사가 140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미국 뉴욕에서 센트럴파크를 만들 당시에 ..
때되면 깨끗이 물러나라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고려 때에는 다섯 성(省)에 일곱 추(樞)가 있어 재상의 숫자가 적었으므로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직책을 제수하였기 때문에, 벼슬은 높아도 한직에 있는 자가 반수나 되어 70이면 반드시 치사하였고, 연령을 숨기고서 치사하지 않는 자는 여론이 나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비록 70이 되지 않았더라도 인끈을 풀고 퇴직을 원하는 자가 많았다. 본조 개국 이래로 비록 치사하는 법이 있었으나 높고 낮은 관원들이 녹을 탐하여 연한을 무릅쓰고 그대로 벼슬하는 자가 거의 전부였다. 요즈음 사헌부에서는 나이가 심히 많은데도 억지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를 미워하여 해당 부처에 공문을 보내어 연령을 상고하여 탄핵하려 했다. 내가 말하기를, “송나라 한위공..
책 읽지 마라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수찬 성간(成侃)은 어려서부터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며 읽지 않은 서적이 없었으니, 경사(經史)로부터 제자백가와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卜筮)ㆍ도경(道經)ㆍ석교(釋敎)ㆍ산법(算法)ㆍ역어(譯語)의 모든 법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사대부나 붕우의 집에 희귀한 서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고야 말았다.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에, 성간이 장서각 속에 있는 비장 본을 봤으면 하고 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궁중 비장 본은 경솔히 외인에게 보일 수 없다.” 하고, 난처해했다. 하루는 혼자서 연일 숙직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돌아보니 바로 성간이었다. 비장도서 보기를 더욱 간절히 청하므로 비로소 허락하였더니, 밤새..
한국에 도교가 없다?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道敎)가 병행하고 있으나 도교가 더욱 성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는 비록 성하나 도교는 전무한 형편이다. 만약 두 개의 교가 병행한다면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한데 장차 어찌 견디겠는가.” 한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소격서(昭格署)와 마니산(磨尼山) 참성(塹城)에서 지내는 초제(醮祭)같은 것은 곧 도가의 일종이다. 서울과 지방을 통하여 항간에서 도가의 복식을 입고 도가의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나, 사대부 집에서 매년 정월에 복을 빌고, 집을 짓고 수리하는 일에 재앙을 제거하려고 비는데도, 반드시 맹인 5ㆍ6ㆍ7명을 써서 경(經)을 읽는데, 그 축원하는 바가 모두 성수(星宿..
적에게 함부로 보이지 말아야 할 것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무절공(武節公) 신유정(辛有定)이 일찍이 왜적을 맞아 여러 번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꿇어앉히고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무절공은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낭 신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기니, 적이 땅에 엎어지는 것을 칼을 빼어 목을 베었다. 당시에 그를 맹장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병사(兵使)가 되어 변방을 진압하니 용맹과 공업(功業)으로 저명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너무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심하게 꾸짖은 뒤에야 끝맺었다.辛武節公有定嘗遇倭賊。賊將跪而斬之。武節見賊兩脚間腎囊嚲下。猝以手拉之。賊踣地。抽劍斬之。時稱猛將。後杖鉞鎭邊。以武烈著稱。然性大急。見人不可。必極口怒罵而後止。孫文僖公碩祖每曰。鑑祖..
남수문과 고려사절요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
관기官妓 유지를 외친 허조를 위한 변명 성현成俔(1439∼1504)의 필기잡록 《용재총화慵齋叢話》 卷之九에 수록된 일화 중 하나다. 허문경공(許文敬公)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자제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큰아들인) 후(詡)와 (둘째아들인)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겠소”라고 했다. 이때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논박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