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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754

AI가 증폭한 윤동주 김별아 작가 포스팅을 보니 내일 2월 16일이 윤동주 시인 공식 사망일이라 한다. 각지를 저화질로 떠도는 동주 사진들을 모조리 AI로 증폭해 봤다. 그대로 클릭해서 다운로드 가능하니 사용하고픈 분들 맘껏 사용하시기 바란다. 2024. 2. 15.
각중에 궁금해서 물어본 안중근 키와 몸무게 현역에서 나름 기자랍시고 우쭐대며 현장을 뛸 때 이야기다. 근자 느닷없이 경기도박물관장으로 튄 이동국 선생이 예술의전당 서예관을 한창 말아드실 적에 안중근 유묵전을 대대적으로 개최한 적이 있는데, 그 유묵 중에는 널리 알려졌듯이 이른바 단지斷指 동맹이라 해서 조국 독립 의지를 다지며 동지들과 손가락 하나를 짤라 맹서한 그 흔적이 오롯하거니와 그는 유묵마다 거개 이 손바닥으로 낙관을 대신해 찍었으니, 그때 전시실을 채운 그 유묵에다가 무심코 내 손바닥을 펴서 얹어보고서는 놀란 점이 하나 있으니 이 유묵 손바닥은 말할 것도 없이 안의사 손바닥 실물크기를 말해줌이라, 한데 그에다 얹어 보니 내 손바닥보다 딱 마디 하나가 짧았다. 아 그때야 못 먹고 살 때니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영 기분이 묘했으니, .. 2024. 2. 15.
정월대보름 조밥을 바다에 띄운 이유는? 어릴 때 저희 지역 바닷가에서는 정월대보름에 조밥을 지어 피마자잎(묵은나물할 때 불려 남겨둔 거)이나 종이에 싸서 물에 띄웠어요. 돌아오지 못한 분들을 위한 거라고. 왜 조밥일까? 궁금했는데 그에 대한 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 김포에 사는 지인 신소희 선생이 아래 설렁탕 조밥에 대한 글에 붙인 일화라, 혹 민속학을 중심으로 이런 쪽에 관심이 있을 분도 없지는 않은 듯해서 따로 소개한다. 혹 이에 대한 조사와 논급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설렁탕에는 왜 조밥을 말아 먹는가 설렁탕에는 왜 조밥을 말아 먹는가 설렁탕에는 쌀밥보다 조밥을 말아 먹는 게 더 맛이 있어서 설렁탕 먹을 줄 아는 사람들은 조밥을 말아 먹는다고 한다. 딱 맞는 말이다. 국물은 쌀밥에는 사실 필요 없다. 필자도 평소에 쌀밥 먹 h.. 2024. 2. 15.
[거란의 치맛바람] (12) 딸을 죽였다고 사위 소손녕을 죽여 순장한 장모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 요사遼史 권80 열전列傳 제18에는 소항덕蕭恆德, 곧 蕭손녕遜寧이 열전이 그의 친형 소배압蕭排押 열전 바로 뒤에 붙었거니와, 이에 의하면 소항덕은 통화 원년(983) 제5대 황제 경종景宗 야율현耶律賢과 예지황후睿智皇后 소작蕭綽 사이에서 난 월국공주越國公主한테 장가들어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어 주로 군사 분야에서 출세가도를 달린다. 물론 굴곡도 없지는 않아서 군사 발동을 잘못했다 해서 공신 칭호를 삭탈당하기도 한다. 통화統和 14년(996)에는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가 되어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치고 개선했다. 문제는 이때 생겼다. 그의 열전에는 이렇게 적었다. (소항덕이 전장에서) 돌아오자 (부인 월국) 공주가 병이 들었다. 태후가 궁인宮人 현석賢釋을 보내 병 간호를 하게 하였는데 소항덕이 그와 사통하니 공주.. 2024. 2. 15.
이조판서 인사발령 이틀만에 급서했다 해서 칭송받은 오재순 정조실록에 의하면 그 16년, 1792년 12월 28일 임진일에 이조판서 정민시鄭民始를 체직하고는 오재순吳載純을 그 자리에 앉힌다. 당시 오재순은 66살 상노인이었지만, 적어도 몇 년은 더 써 먹을 체력은 된다 정조가 생각한 인사조치였다. 하지만 불과 이틀 뒤 오재순은 허망하게 간다. 실록이 적기한 그의 졸기卒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원임 이조판서 오재순이 죽었다. 재순은 자字가 문경文卿이라 고 대제학 오원吳瑗의 아들이다. 풍채가 청수하고 차분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좋이 여기지 않았다. 영종英宗 임진년에 급제하고 상이 등극하자 내각에 들어와 이조·병조판서를 지내고 대제학을 역임했는데, 상이 그의 겸손하고 과묵함을 가상히 여겨 우불급재愚不及齋라는 호號를 내리기도 하였다. 어려서부터 경전.. 2024. 2. 15.
[거란의 치맛바람] (11) 네 번 결혼한 거란의 리즈 테일러 소배압 말고 야율륭서耶律隆緒 만큼 일반에 친숙한 거란 사람 있을까? 드라마가 불러온 현상이다. 이제는 초동급부까지 야율륭서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거란 황금기를 이룩한 위대한 군주라는 야율륭서는 죽어서 성종聖宗이라는 묘효廟號를 얻으니 흔히 이렇게 일컬어지만, 생전에 그 자신은 이런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다. 왜? 귀신이 되어 받은 이름인 까닭이다. 성종은 생식력 또한 왕성했으니, 딸만 해도 열넷을 두었다. 귀비貴妃한테서 야율연가耶律燕哥라는 첫딸을 두니, 이 여식은 수국공주隨國公主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진국공주秦國公主로 바뀌었으며, 흥종興宗 시대에는 송국장공주宋國長公主라 했다. 장공주는 보통 현재의 황제 고모한테 붙인다. 소필리蕭匹里한테 시집갔다. 이 자리서 논하고자 하는 성종 따님은 앞에서도 집중으로 다룬..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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