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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신문이 그 신문? '기뤠기'로 격하된 지금이나, '기자'로 입성한 25년 전이나, 매양 듣는 얘기 중 하나가 신문이 왜 이리 많으냐, 그 신문이 그 신문이라 맨 같은 뉴스 뿐이라 종이 낭비라는 볼멘소리다. 그런가? 이젠 더는 비밀이 아니며, 더구나 언론계 내부까지 속속들이 드러나는 마당에 이참에 그 한쪽 끄터머리에 숨어 있는 한 사람으로 한 마디 꼭 보탠다면 같은 신문은 지구상 인류가 출현한 이래 단 한번도 없다는 점이다. 독자들이 말하는 같은 신문이란 같은 사안을 다룬다는 뜻일 뿐, 같은 뉴스는 없다. 같은 사안이라 해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 눈만큼 다양하다. 10개 신문이 있다면, 10개 뉴스가 있을 뿐이다. 이명박이 독직 스캔들로 검찰에 어제 출두한 오늘 신문들은 일제히 이 소식으로 머릿기사를 삼았다. 보니 .. 2018. 3. 15.
전밀(轉密) 문노(文努)의 유풍을 따르는 신라 화랑 집단에 소속된 불교 승려라는 사실만 확인된다. 활동시기는 그와 교유한 김흠운(金歆運)이 태종무열왕 2년(655)에 사망한 시점을 고려할 때 선덕~진덕~태종무열왕 무렵으로 판단된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김흠운 : 김흠운(金歆運)은 나밀왕(奈密王) 8세손이다. 아버지는 잡찬 달복(達福)이다. 흠운이 어려서 화랑 문노(文努)의 아래에서 놀았는데 당시의 무리들이 아무개는 전사하여 이름을 지금까지 남겼다고 말하자 흠운이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며 격동하여 그와 같이 되려고 하니 동문의 승려 전밀(轉密)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약 전쟁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2018. 3. 15.
순경(順憬) 중대 신라 승려로, 신문왕 시대 무렵이 주된 활동연대일 것이다. 기원사 소속 승려다. 김유신 부하로 용맹함으로 이름을 떨친 열기가 김유신 아들로 당시 국정을 장악한 삼광한데 군태수를 달라했지만 거절당하자, 삼광을 설득해 삼년산군태수를 주게한다. 기타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열기 열전 : 뒤에 유신의 아들 삼광(三光)이 집정하자 렬기가 그에게 가서 군태수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렬기가 기원사(祇園寺) 승려 순경(順憬)에게 말하기를 “내 공이 큰데 군수를 달라 해서 받지 못했으니, 삼광이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고 나를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순경이 삼광을 설득하니 삼광이 삼년산군(三年山郡) 태수를 주었다. 2018. 3. 15.
온달(溫達) 고구려 평강왕 때 일반 백성으로 젊을 적에는 바보라 했지만, 일약 왕의 부마로 발탁되어 군사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신라한테 빼앗긴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 땅을 찾겠다며 신라가 장악한 아단성(阿旦城)을 침공했지만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온달 :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때 사람이다. 얼굴이 못생겨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이 매우 가난해 항상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떨어진 옷을 입고 해진 신을 신고 저자 거리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놀리기를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대장부의 아내가 될 수 없으니 바보 온달에.. 2018. 3. 15.
국천왕(國川王) 고구려 9대 임금 고국천왕을 일컫는 줄임말.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을파소 : 을파소(乙巴素)는 고구려 사람이다. 국천왕(國川王) 때 패자(沛者) 어비류(於留)와 평자(評者) 좌가려(左可慮) 등이 모두 [왕후] 외척으로서 권세를 휘둘러 옳지 못한 짓을 많이 하니, 나라 사람들이 원망하고 분히 여겼으므로 왕은 노하여 그들을 목베려 하였다. ☞고국천왕(古國川王) 2018. 3. 15.
고국천왕(故國川王) 고구려 제9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79~197년). 신대왕 둘째아들이며 이름은 남무(南武)다. 이이모(伊夷模)라는 기록도 있지만, 중국측 기록에는 산상왕 이름이라 혼란이 있다. 국양왕(國壤王)이라고도 한다. 불초한 형 발기(拔奇)를 제치고 태자에 책봉되어 왕위를 이었다. 왕비는 제나부(堤那部) 우소(于素)의 딸 우씨(于氏). 재위기간 후 후한(後漢) 요동(遼東)태수 침입을 받기도 했고 외척들의 반란을 만나기도 했다. 평민인 을파소(乙巴素)를 일약 국상(國相)에 등용하는 파격을 보였고 그의 진언으로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했다. 죽어 고국천원(故國川原)에 묻혔다. 삼국사기 권 제16(고구려본기 제4) 고국천왕 조 : 고국천왕(故國川王)은 이름이 남무(男武)이니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백고가 죽자, 국.. 2018.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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