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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원광대 고고학도 김선기

by taeshik.kim 2018.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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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선기(이영덕 제공)



그저께 교통사고 여파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24일 향년 만 63세를 일기로 타계한 김선기 선생과 나는 거의 인연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교수로서 대학 교단에 자리잡은 것도 아니요, 더구나 내가 문화재업계에 투신한 무렵만 해도 그가 생평을 몸담다시피한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가 고고학 발굴현장에서는 거의 손을 놓고는 발굴 주도권이 국립문화재연구소를 필두로 하는 국립기관과 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손으로 넘어간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이런저런 현장에서 몇 번 얼굴을 마주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은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타계를 접하고 내가 직접 인연에 기반한 회상기를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가 원광대 고고학, 나아가 호남고고학, 나아가 한국고고학에 남긴 족적은 무시할 수 없어, 이런저런 경로로 접한 그의 흔적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하고자 한다. 


그의 원광대 사학과 1년 후배 최완규 원광대 교수에 의하면, 고인은 전북 옥구 출신이다. 그러니 가장 가까이서, 가장 오랜 기간 고인을 지켜본 이가 최 교수라 할 만하다. 고인과 최 교수는 정식 고고학 전담 교수가 없는 원광대 사학과에서 마한백제문화연구소 기틀을 다진 김삼룡 선생과 나중에 동국대로 적을 옮긴 불교사 전공 홍윤식 교수를 사사하면서, 고고학은 철저히 현장 실습을 통해 습득했다. 


최 교수에 의하면 고인과 그 자신은 경주 발굴현장에서 실습을 가서 고고학을 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말하는가"라는 반문에 최 교수는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면 최병현 선생 (감독관) 시절인가 신창수 선생 시절인가" 되물었더니, 최병현 선생 시절이라 했다. 그렇다면 1970년대 중·후반에 문화재관리국이 황룡사지 발굴을 시작할 무렵에 고인은 실습생 신분으로 현장에 투입된 것이다. 나아가 고인은 감은사지 발굴에도 실습생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러니 고인이나 최 교수 모두 박정희 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통해 철저히 현장에서 고고학을 습득한 원광대 고고학 1세대쯤에 해당하는 셈이다. 


고인의 까마득한 학과 후배로 많은 감화를 받기도 했다는 이영덕 호남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실장을 통해 내가 조금 전 넘겨받은 고인 약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덧붙이건대 고인과 더욱 가까웠던 이는 이 군과 학과 동기인 조상미 현 익산군청 학예연구사라 한다. 혹 나중에 여유가 나면 상미군을 통한 고인 일화를 보완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사학과

동아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사학과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1982~1995)

원광대학교박물관 학예연구담당관

호남고고학회장

(사)한국고도육성포럼 감사

전라북도문화재위원

이 정도라면 내가 몸담은 연합뉴스 인명록에도 올라있을 법 해서, 내부망을 통해 그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지만 아쉽게도 없다. 아마도 고인이 어느 대학 교수를 역임했더라면 이런 현상은 빚어지지 않았으리라 본다. 그래, 대한민국에서는 인명록에 등재되려면, 대학교수는 해야 한다는 결론이 이에서도 나오니 몹시도 씁쓸하기만 하다. 


이 약력에서 보듯, 교수가 되지 못한(혹은 안 된) 그의 學的 내력은 원광대 마백연구소 및 동대학 박물관과 궤를 같이한다. 이 두 기관을 통해 고인은 전북 고고학 초석을 다진 인물 중 한 명으로 기록되기에 이른다. 이들 기관이 손댄 유적으로 가장 저명한 곳이 미륵사지 동탑과 같은 익산 지역 왕궁리 유적이 있으니, 고인은 이들 현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했다. 지금은 백제 고고학을 대표하는 이 유적들 곳곳에는 그의 체취가 남은 것이다. 특히 고인의 미륵사 사랑은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까웠다. 그가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도 미륵사지 앞에다가 거처를 정한 이유도 이런 유별난 내력을 증언한다. 


고인은 동아대 박사학위 논문을 손질한 단행본 《익산, 금마저의 백제문화》를 2012년 8월에 도서출판 서경문화사를 통해 발간했거니와, 그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자작시가 실렸다.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미륵사 금당터에 뿌려다오.

그곳에 서려 계실 

백제의 용을 만나 보리라.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마룡지에 뿌려다오.

백제의 꿈을 잊지 못하고 계실

연못속의 용과 함께

용화회상을 기다리리라.


그리고 

사랑보다 더 큰 슬픔은

그리움인 줄 알기에

한없는 그리움에 우짖다가

그들과 함께

초회의 설법에 참여하리라.


나의 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한 줌의 재는 

아버님 산소 곁에 뿌려다오.

고통을 안겨준 사람조차도 

포옹하고자 하셨던

그 품에

다시 안겨보리라...


2012년 05월


원광대학교박물관 유물정리실에서 김선기


음울한 이 시를 고인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그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이영덕 군에 의하면, 고인이 교통사고라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는 했지만, 이미 죽음을 예감하면서 저와 같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말한다. 이 군에 의하면, 고인은 2008년 무렵인가 뇌일혈로 저승 문턱까지 다녀온 일이 있거니와, 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면서 이미 생사를 초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하긴 그런 내력을 대입하면, 저 시가 이해되지 아니하는 것도 아니다. 


고인이 분신처럼 사랑한 미륵사지


아무튼 저 '유언'에서도 미륵사지에 대한 유별한 고인의 애착이 생생히 묻어난다. 저 단행본을 아직 접하지는 못했지만, 이를 간평하는 서경문화사 안내를 보니 이렇다. 


『익산 금마저의 백제문화』는 익산 금마저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책이다. 그동안 익산 지역에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진 사자사지, 연동리 사지, 대관사지, 제석사지, 미륵사지를 중심으로 당탑의 축제 수법과 가람 구조, 출토 유물의 특징을 파악하여 사찰의 축조 시기와 조영 목적 등의 전개 양상을 규명하고 있다. 이는 사찰이 조성되어가는 과정에 나타나는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역사적 맥락에서 본 익산 고도 육성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제시한다.

 

목차

Ⅰ. 緖言 

     1. 金馬渚의 正體性에 대한 爭點 

     2. 硏究史

Ⅱ. 金馬渚 百濟 寺址의 構造와 編年 

     1. 百濟 寺址 槪觀 

     2. 堂塔 構造 

     3. 伽藍 構造 

     4. 出山 기와의 編年

Ⅲ. 金馬渚 百濟 寺址의 特徵 

     1. 寺刹 造營 

     2. 三世祈願寺刹

Ⅳ. 金馬渚 百濟文化의 獨創性 

     1. 遺物을 통해 본 獨創性

     2. 遺構을 통해 본 獨創性

     3. 伽藍 配置의 獨創性

     4. 寺刹 造營의 獨創性

Ⅴ. 金馬渚 百濟 文化의 特徵과 古都 育成 

     1. 金馬渚 百濟文化의 特徵 

     2. 金馬渚 古都 育成 方向

영문초록

일문초록

참고문헌

도면ㆍ사진 인용기관 및 도서목록

찾아보기 


일간 내 찾아보고, 그것을 간평할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미륵사지를 사랑한 고인의 명복을 빌며, 고인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한 나를 후회해 본다.  


*** 추기)  

그의 자세한 행적은 도서출판 주류성에서 발간하는 계간 《한국의 고고학》에 인터뷰 형식으로 실린 적이 있다는데, 나는 아직 그 글을 읽지 못했다. 나아가 방금(2018. 8. 25 저녁 10시 무렵) 숭실대 최병현 명예교수와 통화한 결과, 본인이 황룡사지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1977년 혹은 78년 무렵 원광대 역사교육과에서 파견한 실습생 중 가장 먼저 온 학생으로 기억한다고 하며, 감은사지 발굴은 윤덕향 선생이 학예연구사로 현장을 지휘(상급자는 조유전)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나중에 미륵사지 발굴에 투입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나아가 김선기는 최병현 선생과는 지금은 군산시로 편입된 전북 옥구군 대야면 출신으로 면까지 같은 고향이라 한다. 그래서, 최 선생으로서는 특별히 더 아꼈다고 한다. 최 선생은 고인에 대해 "미련곰탱이처럼 우직하게 자기 할 일만 했다"면서, 이런 성격이 좀 더 나은 자리로 못 나간 까닭인 듯 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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