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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1495

시가 별로인 한국전통문학 필자 정도 수준에서 한문학을 평가할 수 있을지 좀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냥 있는 느낌대로 써 보면,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비교하여 시가 별로다. 20세기 이전 국문시 뿐 아니라 한시도 별로다. 읽어 봐도 별로 감흥이 없다. 그 시대 사람들은 달랐는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없는 감흥을 있다고 할 수야 없지 않겠는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이야기하는 어린애의 치기로 봐주기를. 반면에 동문선을 보면 우리나라는 시를 제외한 나머지 서, 발, 전 등 문장들은 좋은 글이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소명 문선을 보면 전체의 거의 절반 정도가 시인데 반해, 동문선에는 시가 전체의 17프로 밖에 실려 있지 않다. 동문선이 대부분 고려시대-조선초의 저작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장을 낮게 보는 .. 2023. 8. 8.
데라코야寺子屋와 서당 일본의 근대교육과 한국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전통 교육기관이던 서당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였다. 이것이 아주 의미가 깊은 부분인데, 한국의 서당에 해당하는 것이 일본의 데라코야寺子屋이다. 일본은 데라코야 선전을 엄청나게 한다. 전국적으로 몇만 개가 있었는데 그 숫자는 유럽을 앞질러 일본의 교육수준이 이만큼 높았다던가 하는, 뭐 이런식의 국뽕 선전이다. 그런데-. 조선에도 국치 이전 서당은 넘칠 만큼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전통사회에서 한국이 서당이 부족했겠는가? 한국 전통사회에 동네마다 서당이 있었던 연고가 깊다는 고구려시대 경당만 봐도 안다. 고구려 경당을 일각에서는 후대의 향교처럼 생각하여 지방 교육기관으로 보지만 필자가 보기엔 경당은 서당의 기원이다.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으로서 아주 중.. 2023. 8. 8.
읽는 사람이 없었던 일제시대 잡지들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았던 유명한 일제시대 동인지들. 폐허, 창조, 백조 등등. 이런 동인지들은 통권 10호를 넘지 못했고 창간과 함께 폐간, 2호 내고 폐간도 많았다. 이를 대개는 일제의 탄압으로 쓰고 그것도 사실일 수도 있겠지만, 더 문제는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고 하겠다. 왜? 조선인 대부분이 문맹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근대사상 최초로 대중 판매가 폭발적으로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고 그것이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실상의 최초의 잡지였을 "사상계"가 가능해진 이면에는 한국에서 까막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는 데 그 첫 번째 이유가 있다 하겠다. 사상계가 폭발적 판매고를 올리던 50년대 말이 되면 이미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대량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이들이 이승만 정부.. 2023. 8. 8.
학력 뻥튀기에 가려진 일제시대의 실상 필자가 전술한 바와 같이 일제시대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는 조선인들의 교육수준이 전반적으로 낮고 이것이 제도적으로 재생산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측면이 종전의 연구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 많았는데 왜일까. 해방직후 한국의 문맹률이 70-80프로에 달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이는 엄연한 팩트임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 많다. 누구라도 물어보면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들도 "한학"을 배웠다고 한다. 한학이라.. 일제시대에 한학이라면 무학이고, 문맹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우리나라 일제시대에는 글자 읽은 지식인이 천지인 세상이 되는 것이다. 조선바닥에는 고등학교라고는 경성제대 예과 하나.. 2023. 8. 8.
전 국민이 일주일에 한 번은 닭고기 먹게 해주고 싶다던 앙리4세 오늘날 북한을 보면 반공교육이 필요 없다. 김정은이 나오는 사진에서도 주변 북한 사람들을 보면 못 먹고 사는 분위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가 그렇다. 조선시대는 잘 먹고 잘 산 적이 없다. 고기? 우리가 흔히 생각할 때 집집마다 닭을 키우고 돼지 키우고 소 키웠을 것 같지만, 조선시대건 고려시대건 삼국시대건 우리나라는 사육동물뼈보다 야생동물 뼈가 희안할 정도로 많이 나오는 나라다. 상당히 시대가 내려올 때까지도 사냥은 단순히 유희가 아니라 단백질 공급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생산활동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이렇게 산과 들에 의지하여 육류를 섭취하던 조선의 시스템이 위기에 봉착한 것은 17세기였다. 이 시기에 산과 들이 개간되고 농사 지을 수 있는 곳은 몽땅 농사짓게 되면서 비로소 야생동물에 육류를 의.. 2023. 8. 6.
고대 음식의 대체재 닭과 꿩 사슴과 돼지 어느 한 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 소비가 줄어든다. 조선시대 일기를 보면 한번 꿩 사냥 나갔다 하면 100마리씩 잡아왔고 이런 사냥을 한 달에도 여러 번 나갔다. 닭을 키울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조선시대 아마 닭은 달걀 때문에 키웠을 것이다. 일기를 보면 닭잡아 먹은 기록보다 꿩 고기 먹은 기록이 더 많고 구한말까지도 닭값보다 꿩값이 더 쌌다. 우리가 지금 보는 대규모 양계장은 일제시대에 처음 모습을 보였고 지금처럼 국민 육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80년대 이후이다. 70년대까지도 닭은 "영양센터"에서 팔았다. 사슴과 돼지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차피 둘 다 평민들에게는 맛보기 어려웠겠지만, 사슴고기를 쉽게 구할수록 돼지사육은 줄어들고, 사슴이 드물어질수록 돼지 사육은 늘게 .. 2023.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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