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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025

신라인들은 왜 당에서 귀국하지 않았을까 흔히 당으로 간 신라인을 이야기 할 때, 당이라는 세계가 가진 개방성, 국제성, 그리고 이에 반해 골품제로 상징되는 신라사회의 폐쇄성을 이야기 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 국가에도 패망시킨 나라의 왕과 장군을 잡아와 자국의 고위직 관리로 등용하여 쓰는 경우는 없으니까 말이다. 빈공과 급제자를 자국에 취업할수 있게 하는 것도 놀라운 개방성이다. 이 정도의 개방성을 갖춘 나라는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 그리고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건너가던 고대국가 성립기의 일본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 가지 이 문제에 있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신라가 폐쇄적이라서 당으로 가서 거기 눌러앉았는지 어떤건지 필자로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가능성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기의 .. 2023. 4. 22.
신라밀교승 혜초와 혜일 이야기 재미있는 점은-. 밀교 고승들 이야기다. 이들의 행적이 완전히 밝혀졌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신라의 경우 밀교가 중국에 전해지던 초창부터 이에 참여하여 경전의 한역과 밀교의 중국 토착화에 기여한 정황이 매우 확실하다. 일본에서 밀교진언종이 전하는 진언종의 내력은 다음과 같다. 여기서 마지막에 홍법대사弘法大師 공해空海[구카이]가 있다. 구카이의 스승인 혜과惠果가 바로 앞에 있다. 혜과가 구카이에게 밀교 불법을 전하고 그것을 받아 구카이는 일본에 진언종을 만들었다 그 이야기다. (뭐 일본에서 보는 해법이니 이를 시비할 생각은 없다) 혜과 앞에 여섯 명이 더 있다. 가장 앞의 용맹은 대승불교 용수와 같은 사람이다. 밀교도 시조는 용수이다. 그 다음 용지까지는 인도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금강지와 불공이 인도에서 .. 2023. 4. 22.
후손을 잘 만난 구카이[공해空海, 774~835] 일본의 밀교진언종 쿠카이空海는 굉장히 유명하다. 필자가 배우는 일본문화 윤독반에서 발표를 준비하다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 불교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밀교진언종의 사실상 개조이기 때문에 그가 처음 일본에 밀교를 들여와 이식한 과정이 굉장히 미화해 있다. 일본측 설명에 의하면, 그는 중국밀교의 정통을 이은 혜과의 사랑받는 제자로 그가 죽었을 때 구카이는 친히 스승 혜과를 기리는 비문을 짓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카이는 혜과를 만난지 반년만에 혜과恵果가 죽었다. 쿠가이는 혜과의 제자가 맞기는 할까? 겨우 5개월만에 "스승"이 죽었는데? 필자는 그가 스승 혜과의 비문을 제자를 대표해서 지었다는 그 전승도 의심한다. 사실 이 비문은 전해오기는 하는데 내가 아는 한, 이 비문 출전은 구카이 개인 .. 2023. 4. 22.
유사의학과 유사인문학의 경계에서 협동연구, 학제간 연구, 통섭적 연구 다 비슷한 소리인데 결국 어떤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분과적 시각을 극복하고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 되겠다. 얼핏 듣기에는 좋은 말인데 사실 이런 작업을 하다 보면 기대한 성과보다 얼토당토 않게도 비전문가적 수준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필자의 경우 의대에서 녹을 먹으며 살고 학생들에게도 의과대학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데 연구 분야는 소위 말하는 협동연구 학제간 연구 통섭적 연구라는 간판을 걸고 작업을 하다 보니, 항상 가장 두려운 것이 유사의학 (pseudo-medicine), 유사인문학 (pseudo-humanities) 수준에 머물러 그런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할 수 있다. 지금 그 수준은 넘어선 것인지 아니면 거대한 유사학문.. 2023. 4. 20.
식민사관의 극복은 무엇으로 했는가 역사연구로? 천만에. 역사연구로 소위 식민사관이 극복된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필자가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냉정하게 자평해 보면 알 것이다. 한국에서 역사적 패배주의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식민사관 연구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950년대 이래 한국의 근대화가 성공하면서 역사적 패배주의, 정체론, 숙명론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대에는 이런 경향은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일본사를 공부하다 보면 뭔가 석연치 않고 논리에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이야기도 일본이 결국 자주적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에 면죄부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왠지 우리 이야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제 귀기울여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면, 그 이유는 역.. 2023. 4. 19.
일본과 한국 근대화의 성패를 갈랐던 시대는 에도시대가 아니다. 에도시대에 일본과 조선이 엄청난 차이가 있는 줄 알고 이 시대를 엄청나게들 파는데. 실제로 양자간 결정적 차이가 발생한 시기는 메이지시대다. 한국사는 이 시대를 이미 "제국주의가 완성된" 일본이 조선을, 한국을 침략한 시대로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이 시대 일본도 살아 남자고 죽도록 몸부림치는 시대였다는 말이다. 메이지시대, 우리로는 고종의 시대야말로 양자간 하나는 제국주의가 되고 하나는 식민지가 되는 결정적 시기였는데, 이 시기를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의 시기"로만 보다 보니 사실을 놓치는 면이 매우 많다. 에도시대? 조선이나 일본이나 거기가 거기다. 메이지시대. 매우 중요한 시대다. 한국학자들은 여기를 집중적으로 파야 한다. *** Editor's Note *** 조국근대화.. 2023.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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