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당으로 간 신라인을 이야기 할 때, 당이라는 세계가 가진 개방성, 국제성, 그리고 이에 반해 골품제로 상징되는 신라사회의 폐쇄성을 이야기 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현대 국가에도 패망시킨 나라의 왕과 장군을 잡아와 자국의 고위직 관리로 등용하여 쓰는 경우는 없으니까 말이다.
빈공과 급제자를 자국에 취업할수 있게 하는 것도 놀라운 개방성이다. 이 정도의 개방성을 갖춘 나라는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 그리고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물밀듯이 건너가던 고대국가 성립기의 일본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 가지 이 문제에 있어 잊고 있는 것이 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신라가 폐쇄적이라서 당으로 가서 거기 눌러앉았는지 어떤건지 필자로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한 가지 가능성으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기의 지식인이나 가지고 있는 "세계적 수준에 뛰어 들고픈 욕망"도 신라인의 귀추에 단단히 한몫했으리라 보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전쟁기-통일기 도당유학생들은 당이라는 큰 물에서 소위 당시 세계적인 수준에서 놀던 사람들인데 귀국하면 그 수준에서 멀어진다는 아쉬움과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다.
선진 세계에 유학을 하면 결국 "버티느냐" 아니면 "귀국하느냐"의 기로에 항상 서게 되는데 이는 60-80년대 국가개발기 한국의 상황을 보아도 알수 있다.
당시 한국은 아직도 못 사는 나라였지만 과연 "미국에서 버티던 유학생"들이 한국이 답답하고 못 사는 나라라서만 미국에 눌러 앉아 있었을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서 끝까지 버틴 상당수 학자는 귀국하게 되면 결국 "이렇게 세계적인 수준에서 놀아보는 삶"에서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 했을 것이다.
한국이 이들을 밀어내어 미국에서 버티고 있었다기 보다는 미국의 흡인력이 강했던 것이 더 큰 이유가 되는 셈인데-.
신라의 유학생들이 당에 눌러앉아 버티며 결국 거기서 뼈를 묻게 되는 이유는 단순히 "신라의 골품제" 이상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수준에 대한 희구심이 강한데, 신라의 도당유학생이라 해서 달랐을 리가 없다.
*** Editor's Note
당에 견준 신라사 폐쇄성 증좌로 흔히 골품제가 싫어서 당으로 귀화한 설계두를 들기도 하지만
필자가 말한 세계 무대 주류에서 놀고자 하는 욕망은 컸다.
충선왕인가는 고려왕 때려치고 당시 세계 수도 연경에 가서 놀면서 세계사를 주름잡으니 돌아가 다시 고려왕 하라 해도 거부하고 눌러앉았으며
정약용은 내 실력이면 중국을 주름잡았을 것이라며 조선에 태어난 운명을 저주했다.
최치원의 울분은 다시 말해 무엇하랴?
또 하나 직업에 따라 저 의식이 좀 달랐듯한 흔적도 간취됨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본다.
승려가 대체로 길게 유학생활을 하는데 그들은 회소 본능이 유학생보다는 강했다고 나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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