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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022

내놔야 할 의무가 없어 의병이 된 사대부들 앞에서 조선후기 재지 사대부들은 국가에서 녹을 먹지 않고도 충분히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그 경제적 기반은 결국 향촌사회의 지주라는 신분에서 나오는 것인데 문제는 이러한 대대로 먹고 살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그 어떤 의무 없이도 주어지고 있었다는 점이 문제겠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막부이건 번이건 간에 이에 소속된 사무라이들은 대대로 녹을 받아 먹는 대신에 유사시 소정의 군사력을 제공하도록 정의되어 있었다. 유사시 내놔야 하는 군사력의 반대급부로 석고제 하의 녹이 주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 조선후기 사대부들은 이와 비슷한 토지를 소유하고 이로부터 나오는 재부로 대대로 먹고 살지만 그 반대급부로 내놔야 할 부분이 정의된 바 전혀 없었다. 조정에 출사하여 관직에.. 2024. 9. 18.
붕당론과 당쟁 조선시대의 당쟁을 붕당론이라는 이름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야기하며 옹호하는 입장이 있는데 애초에 도학자들의 세계관에서 견제와 균형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본다. 조선시대에 당쟁, 붕당정치가 끝도 없이 전개된 이유는 정쟁에서 패배해도 진 쪽도 진 것 같지 않게 세력이 끝없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당쟁의 원인으로 사람은 많은데 관직은 적어서 싸움이 났다는 주장도 봤는데 이것도 어폐가 있는 것이 어차피 과거 급제해봐야 얻을 수 있는 관직도 제한되어 있었고, 우리나라 사대부라는 사람들은 애초에 나라에서 녹봉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과거란 자신들이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이란 것을 딱 증명하기 위한 정도면 되는 것이었고, 과거 급제한다고 해서 그로부터 먹고 살 기반이 나오는 것이 아.. 2024. 9. 18.
조선시대 사마시 조선시대의 사대부들과 일본 에도시대의 사무라이는 둘 다 士이다. 일본에서 士라고 하면 바로 사무라이를 가리킨다. 공경을 士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조선후기 한국의 선비들과 일본 에도시대 사무라이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전자는 벼슬 없이도 재지 지주로서 대대로 선비의 자격을 물려줄 수 있는데 반해 후자는 막부건 번이건 소속되어 직역을 받지 않는다면 사무라이로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급제자에서 유심히 봐야 할 부분은 사실 사마시다. 사마시만 통과하면 향촌애서 재지지주이자 유력 사대부 집안으로 계속 존재할수 있었기 때문에.... 향촌에서 사마시만 통과하고 지주로 계속 살아간 이런 계층은 에도시대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계층이다. 2024. 9. 17.
배고프면 학문도 없다 조선후기 그리고 에도시대. 임란 이후 불과 백년만에 홀라당 한일간의 학문수준이 역전되어 버린 것은 딴 것 없다. 조선이 못 살았기 때문이다. 임란 이후 에도시대 저쪽 지식인들을 보면 눈에 띄는 것이 질과 양적으로 독서의 범위가 매우 넓다는 것이다. 왜이겠는가? 돈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비들은 왜 몇 종 되지 않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겠는가? 돈이 없어 책 사보기에 넉넉치 않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고 배고프면 학문도 없다. 이것은 60 이후 공부를 생각하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경제적 곤란은 없고 책 사 볼 돈은 있어야 연구고 나발이고 되는 것이지, 먹고 사는 데 바빠서야 60 이후 연구고 나발이고 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 연구가 왜 세계 최강이겠는가? 결국 경제적 부인 것이다. 주.. 2024. 9. 17.
부여와 고구려는 휴경을 극복했을까 앞에서 필자는 벼농사는 수전경작 때 외부로부터 매년 새로 유입 유출되는 논물로 인해 연작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자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일부 수전의 경우 매년 연작이 가능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남만주 일대, 부여와 고구려는 어떨까. 여기는 논이 거의 없는 곳이었을 텐데 (고구려의 경우 평양천도 이전) 이들은 농사에서 휴경을 극복했을까. 거의 밭농사 일색일 텐데 휴경과 화전을 매개로 한 윤작을 극복하고 있었을까 부여와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하고 결국 남쪽의 국가가 승리한 이면에는 논의 연작에서 오는 생산력 제고가 과연 무관했을까 2024. 9. 15.
1966년 4월의 조선일보 기사: 기마민족도래설 이것이 1966년 4월, 일본학계의 소식을 전하는 삼불 선생의 언급인데 이 기사에서 에가미 나미오 선생의 "기마민족도래설"이 소개되었다. 이보다 앞선 소식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현재 신문 검색으로는 나오는 최초의 기사로 에가미 선생의 이 주장이 대중에 확산되면서 한국인은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통념이 1980년대 민족주의 열풍을 타고 급속히 퍼져나갔다. 20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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