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당쟁을 붕당론이라는 이름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야기하며 옹호하는 입장이 있는데
애초에 도학자들의 세계관에서 견제와 균형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본다.
조선시대에 당쟁, 붕당정치가 끝도 없이 전개된 이유는
정쟁에서 패배해도 진 쪽도 진 것 같지 않게
세력이 끝없이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우리나라 당쟁의 원인으로
사람은 많은데 관직은 적어서 싸움이 났다는 주장도 봤는데
이것도 어폐가 있는 것이
어차피 과거 급제해봐야 얻을 수 있는 관직도 제한되어 있었고,
우리나라 사대부라는 사람들은 애초에 나라에서 녹봉받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과거란 자신들이 뼈대 있는 사대부 집안이란 것을 딱 증명하기 위한 정도면 되는 것이었고,
과거 급제한다고 해서 그로부터 먹고 살 기반이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당쟁에서 실세한 영남 유림들이 무려 수백년을 큰 벼슬없이도
세를 이루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애초에 조선의 사대부들의 기반이란 직역과 결부된 녹이 아니라
국가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자신들의 땅으로부터 경제적 부가 나오고,
과거는 요즘으로 치자면 박사학위 정도로서
좀 배웠다는 증명 정도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중앙정부에서 실세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힘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색당파가 수백년을 향촌사회에 뿌리 박고 무너지지 않고 내려간 것이다.
일본은 이런 사색당파가 나올 수가 없었다.
에도막부 이전은 싸움에서 패배한 쪽은 깡그리 멸족에 가까운 처분을 받았고
에도막부 이후에는 직역과 무관한 무사계급이란 존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티비나 신문을 보면
유서 깊은 조선시대 가문에서 "벼슬은 딱 진사까지만 해라"는 이야기를 한 곳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데,
애초에 진사라는 건 사마시로 명예직이나 다름없어
돈이 생길 만한 자리가 아니었고,
사마시 합격자에게 지급되는 백패는
배운 사람이라는 증명서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중앙의 권력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재정적 기반.
향촌 지주로서의 기반.
이것이 바로 수백년 동안 당쟁이 이어졌던 에너지에 해당했던 셈이 되겠다.
조선후기 향촌에 살던 조선의 사대부들은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유럽사의 landed gentry라는 계급과 유사점이 많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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