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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필자는
벼농사는 수전경작 때
외부로부터 매년 새로 유입 유출되는 논물로 인해
연작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자 그렇다면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는
일부 수전의 경우 매년 연작이 가능해지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남만주 일대,
부여와 고구려는 어떨까.
여기는 논이 거의 없는 곳이었을 텐데 (고구려의 경우 평양천도 이전)
이들은 농사에서 휴경을 극복했을까.
거의 밭농사 일색일 텐데
휴경과 화전을 매개로 한 윤작을 극복하고 있었을까
부여와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하고
결국 남쪽의 국가가 승리한 이면에는
논의 연작에서 오는 생산력 제고가
과연 무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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