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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024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국대안 파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서칭만 해도 다 나오기 때문에 많이 적지 않겠다. 여기서는 국대안 파동 진행과정에 대한 약간 언급과 함께 그 결과만 다루고자 한다. 1. 국대안파동은 미군정 당국의 목적도 그러했고 최종 결과물도 어디까지나 "미국식 교육제도에 입각한 종합대학" 건설이었다. 당시 경성제대와 국공립 전문학교는 전공별로 산재하였는데, 해방 이전에도 일본인 교수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인 교수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긴급 충원된 조선인 교수로 급조한 전문학교가 전공별로 산재해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미군정 당국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옳다. 특히 미군정의 최종 목표는 일제하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 형태를 띤 조선 교육을 미국식 6-3-3-4제를 도입하고 최종학부인 대학.. 2023. 3. 21.
대한민국의 50-70년대 (5): 국대안 파동 (1) 국대안 파동이라는 것이 해방 직후에 있었는데 여기 관심 없는 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이 사건은 해방이후 남북분단, 좌우대립에 촉매제 역할을 한 사건인데, 대학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종전의 한국 내 대학과 전문학교를 묶어 "국립서울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대학이라 해 봐야 해방 이전의 경성제대-해방이후 경성대 딱 하나였고, 나머지 국립 전문학교는 각 분야별로 있었는데 이를 모두 단과대학별로 해체모여 하여 "국립서울대"라는 단일 체제로 정리하겠다는 것이어었다. 이 국대안파동은 현재 사학계에서 내린 평가가 필자가 보는 한 별로 공정하지 않다. 일단 남북분단 책임을 미국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은연중 투영되어 있는 저작이 많고, 국대안 파동이 미군정.. 2023. 3. 20.
북한, 탈북자: 몇개의 단상 최근 북한과 탈북자를 보고 드는 생각을 써 본다. 1. 언젠가 북한의 역사를 유심히 보면 조선을 이해할 단초가 보인다는 이야기를 썼다. 북한에서 배급제가 무너지고 장마당 경제가 일어나는 과정은 아마도 조선 전기의 과전법 체제가 붕괴하고 시장경제의 맹아가 분출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을 것이다. 북한의 경우 조선 못지 않은 폐쇄 경제이므로 지금 북한이 도달한 장마당 경제 수준이 조선시대 시장경제 모습을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을 것이라 본다. 농업에 기반하고 딱히 뭐 경쟁력 있는 산업이 없는 상태에서 바깥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동맹 없이 고립되어 버리면 도달할 수 있는 "시장경제" 모습은 딱 지금 북한 정도가 최고점이라는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이 최고점에 거의 근사하게 도달.. 2023. 3. 20.
오늘 글의 보유: 해방직후 서울대의 상황 필자가 쓴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해방직후 서울대는 제대로 된 대학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서울대가 경성제대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서울대에 경성제대의 교원과 연구, 교육전통이 해방이후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해방이후 경성제대는 완전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집으로 이주해 들어간 조선인 교수들은 출신 배경도 다양했다. 이들이 당시 조선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자원 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경성제대가 해방이후 문을 닫게 되었을 당시, 이 대학에는 불과 한달전에 조교수로 임명된 조선인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 서울대 교수로 들어간 분들은 출신 배경이 정말 다양해서, 의대의 경우에는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세브란스의전, .. 2023. 3. 19.
대한민국의 50-70년대 (4): 해방과 함께 텅빈 경성제대 의학부 앞에서 해방 직후 상황 두 가지를 설명하였다. 하나는 일반 국민들의 문맹률. 무려 네 명 중 세 명이 문맹 상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 좀 배웠다는 식자층은 달랐느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 반도 내에는 대학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랐고 이 때문에 30년대 부터는 아예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조선인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일본 유학생 수가 급증하는 것은 일차적인 원인은 조선 내에 쓸 만한 대학이 별로 없다는 데 있었다 할 수 있다. 경성제대는 이때 이미 있었지만, TO가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누어 뽑았고 입학생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대적 비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왜곡된 구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경성제대를 나와 봐야 어차피 .. 2023. 3. 19.
대한민국의 50-70년대 (3): 해방 직전 조선인 인텔리 상황 일전 글에서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구한국 공무원들이 조선총독부 관할 하급 공무원으로 대거 편입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소위 칙임관, 요즘으로 치면 고급공무원 군에는 일제시대 내내 조선인은 거의 없었고, 조선인 관료는 대개 말단을 전전했다. 요즘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다고 욕을 먹는 당시 관료 대부분의 직급이 말단인 이유다. 이런 상황은 대학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해방직전 조선에는 잘 알다시피 대학이라고는 경성제대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전문학교" 였는데, 이때문에 고급관료나 학자를 양성할수 있는 TO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애초에 45년 당시까지 문맹자가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뚫고 최고학부까지 졸업해도 "학사"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숫자가 극히 적었다는 말이다. 의대의 경우, 경.. 2023.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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