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쓴 글을 보시면 알겠지만, 해방직후 서울대는 제대로 된 대학교육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서울대가 경성제대 후신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서울대에 경성제대의 교원과 연구, 교육전통이 해방이후 그대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는 해방이후 경성제대는 완전히 빈집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빈집으로 이주해 들어간 조선인 교수들은 출신 배경도 다양했다.
이들이 당시 조선에서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인적자원 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경성제대가 해방이후 문을 닫게 되었을 당시, 이 대학에는 불과 한달전에 조교수로 임명된 조선인 교수가 딱 한 명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 서울대 교수로 들어간 분들은 출신 배경이 정말 다양해서, 의대의 경우에는 경성의전, 경성여의전, 세브란스의전, 이화여전 등에서도 교원이 많이 영입되었으며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개업의가 교수로도 많이 들어왔다.
인문대에서는 보성전문에서 영입된 교수도 많은 것으로 안다. 그 외에 일본에서 유학하였던 분도 많이 귀국하여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교수가 한 군데 모여 있으니 당연히 이 전의 경성제대고 뭐고 그 전통이 내려 올 리가 없다.
환골탈태라는 것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해방이후 11월까지는 일본인 교수들이 출근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로 인수인계가 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해방이후 서울대 교수가 된 분들은 이전의 경성제대 교수들과 사제관계로 연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45년 당시, 경성제대를 인수 인계한 "경성대학"은 정확히 말하자면 경성제대의 후신이 아니라, "적산가옥"이나 다름없었다 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벌어진 일이 바로 유명한 "아리미쓰 교이치"선생을 해방이후 귀국도 못하게 하고 잡아 두고는 발굴 지휘를 시킨 일이다.
이런 일은 당시 고고학계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닐 것이라 본다.
그만큼 해방이후 국내 대학의 역량은 열악했다.
조선땅 전체를 바닥까지 닥닥 긁어 모아도 조선인만으로 이루어진 대학 하나 제대로 못 만들 정도 역량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정이 전부가 아니었다. 두 번의 치명타가 국내 대학교육에는 더 밀어닥치는데,
하나는 국대안 파동
두번째는 한국전쟁이다.
이 두 번의 파동을 거치면서 한국 대학교육은 1945-53년까지 완전히 초토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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