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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by 초야잠필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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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안 파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서칭만 해도 다 나오기 때문에 많이 적지 않겠다. 

여기서는 국대안 파동 진행과정에 대한 약간 언급과 함께 그 결과만 다루고자 한다. 

 

1. 국대안파동은 미군정 당국의 목적도 그러했고 최종 결과물도 어디까지나 "미국식 교육제도에 입각한 종합대학" 건설이었다. 

당시 경성제대와 국공립 전문학교는 전공별로 산재하였는데, 해방 이전에도 일본인 교수가 대부분이었고 한국인 교수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해방 이후 긴급 충원된 조선인 교수로 급조한 전문학교가 전공별로 산재해서는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미군정 당국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옳다. 

특히 미군정의 최종 목표는 일제하 전형적인 식민지 교육 형태를 띤 조선 교육을 미국식 6-3-3-4제를 도입하고 최종학부인 대학을 미국식 종합대학으로 편제해 내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식민지 시기 조선 교육은 고급 교육으로 갈수록 조선인에게 제한이 있어 신생독립국인 한국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양성함에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이는 미국식 제도를 도입하고 말고 하기 이전의 문제였다. 

따라서 미군정으로서는 서울대 건설을 반대하고 지금 작은 단과대학을 유지하며 대학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은 일본에서도 전후 진주한 GHQ가 한국과 거의 동일한 미국식 교육 시스템으로 일본 교육을 송두리째 뜯어 고치고 있었다. 

 

2. 국대안 파동은 서울의전 (구 경성의전)과 경성대 (구 경성제대)의 통합과정만 무난히 넘어갔다면 큰 문제 없이 끝날 수 있던 사안이었다. 하지만, 앞에서 본 것처럼 일본의 학제 하에서는 이 두 대학 출신은 "학사"와 "디플롬"이라는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통합이 만만치 않았다. 

그 후의 한국대학 발전 상황을 보면 아마 의대 통합은 결국 경성의전과 경성제대 출신 모두에게 학사학위를 주고 (경성의전도 학사로 인정) 통합을 이루는 것이 가장 순탄한 해결방법이었을 것 같은데, 이 방법 대신 경성의전은 신생 서울대의 전문과정으로 편입하고 학사호는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통합을 결정해 버렸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경성의전 출신의 반대가 격화하고 이 싸움이 국대안 파동을 길게 끌고가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3. 국대안 파동은 일차적 갈등이 경성의전과 경성대 간 학력차이에서 발생했는데, 이후 정치적인 문제로 비화하여 대학과 미군정의 대결로 치달았다. 해방이후 좌파 계열 움직임을 보면, 아마 국대안도 당 차원의 정치적 공작이 없었을 것이라 단언하기 힘든데, 아무튼 국대안 파동은 처음에는 대학 개편이라는 단순한 행정상의 문제에서 시작하였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전, 최대의 정치적 이슈 중 하나로 비화해 버렸다. 

4. 국대안 파동은 어떻게 끝났을까? 결국은 미군정 뜻대로 한국 교육은 6-3-3-4 제도로 완전히 바뀌는 첫 걸음을 띠게 되었고, 이전에 1개 대학과 몇 개 전문학교로 최고학부 역할을 자임하던 빈약하기 짝이 없던 신생 독립국에 어쨌건 외형상으로는 미국식 종합대학이 하나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종합대학은 이후에 사립대학도 벤치마킹하여 연전, 보전 등도 모두 비슷한 성격의 종합대학으로 변신하였다.

종합대학으로 서울대가 출범하지 않았다면 세브란스의대와 연희대학이 과연 통합했을까? 

5. 국대안 파동은 그냥 끝난 것이 아니라 해방 후 서울의전과 경성대 교수로 부임하여 갓 1년 정도 지난 조선인 교수들이 두쪽으로 갈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많은 월북자가 발생하였고, 이중 상당수는 건국을 서두르던 북한의 대학 교육에 참여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국대안 파동의 또 다른 결과물이기도 하다. 

해방이후 전국에서 긁어모아도 종합대학 하나 만들기도 빠듯한 조선에서, 그 대학도 둘로 빠개져서 남과 북에 하나씩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허약한 대학교육 역량은 해방 이전 더 한층 악화했는데, 여기에 결정타를 준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서울대는 설립과정에서 크게 두번의 대격변을 겪는다. 이 도표상에는 경성제대와 경성대학이 이어지는 것으로 그려 놓았지만 필자가 이미 쓴바와 같이 경성대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조선인 학자들에 의해 경성대학이 거의 새로 만들어지다 시피 하였다. 이 표를 유심히 보면 "학사호" 소지자와 "디플롬 소지자" 사이의 갈등은 다른 단과대학에서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법대에는 경성대학 법학과와 경성법전이 하나로 합쳐졌기 때문이다. 공대도 경성대 공학과와 경성공전, 경성광산전문 등이 합쳐져서 단과대학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에서 유독 경성제대와 전문학교 출신의 싸움이 격화된것은 다른 전공에 비해 양자간의 경쟁이 임상의학계에서 이미 치열하였고, 의사면허 취득후에는 양자가 별차이가 없었단 점을 들수 있겠다. 해방 이전에 경쟁력없는 다수의 단과대학을 유지하고 있던 전문학교를 해체하여 경성대학과 묶어 미국식 종합대학을 출범시키는것이 목적이었는데,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것이 유감이다. 어찌 되었건 국대안 파동은 한국에 미국식 6-3-3-4제의 도입과 함께 해방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명실상부한 조선인만의 종합대학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P.S. 1) 국대안 파동의 미군정과 그 반대측 입장에 대한 온라인 상 글은 전반적으로 중립적이지 않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당시 미군정의 대학개편안이 내용상으로는 전반적으로 옳았다고 보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를 지적한다면 모를까, 명분상에서는 이 개편안에 반대하는 측의 주장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경성제대와 경성의전의 갈등이 국대안 파동을 크게 키운 측면이 있는데, 양자간 갈등은 해방 이전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원만한 해결을 유도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P.S. 2) 서울의대 졸업생 명부를 보면 해방 정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경성제대와 의전 졸업생 상당수가 월북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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