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글에서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구한국 공무원들이 조선총독부 관할 하급 공무원으로 대거 편입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소위 칙임관, 요즘으로 치면 고급공무원 군에는 일제시대 내내 조선인은 거의 없었고, 조선인 관료는 대개 말단을 전전했다.
요즘 일제시대에 "친일"을 했다고 욕을 먹는 당시 관료 대부분의 직급이 말단인 이유다.
이런 상황은 대학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었다.
해방직전 조선에는 잘 알다시피 대학이라고는 경성제대 하나이고 나머지는 모두 "구제전문학교" 였는데, 이때문에 고급관료나 학자를 양성할수 있는 TO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애초에 45년 당시까지 문맹자가 절대 다수인 상황에서 이를 뚫고 최고학부까지 졸업해도 "학사"자격증을 가진 사람은 숫자가 극히 적었다는 말이다.
의대의 경우, 경성제대 의학부와 의전이 몇 개 있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입학 TO가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리고 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졸업해도 경성제대의 경우 조선인이 교수 요원으로 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해방 이전에도 경성제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해방 이후 서울대 교수가 된 경우가 극히 희귀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의대만 그런 것이 아니고, 서울대 모든 단과대학이 동일 한 상황이었다.
해방 후 한국 역사학 기틀을 잡은 이병도의 경우, 해방 직전 이화여전 강사였는데 이때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50이었다.
해방 당시 그는 박사학위도 없었고, 보성전문과 와세다 출신 사학도로 경성제대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다.
만약 해방이 없었다면 이병도는 서울대 교수로 정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화여전 강사로 그의 이력은 끝이 났을 것이다.
의대도 마찬가지로, 경성제대를 졸업하건 뭐를 졸업하건 간에 조선인은 거의 개업을 하거나, 아니면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상태였다.
최고학부인 조선반도 내 유일의 경성제대에는 조선인 교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도둑처럼" 해방이 왔다.
*** 편집자注 ***
이러한 일련의 문제제기는 결국 한국 근현대사를 친일 대 반일, 친미 대 반미, 민주대 반민주, 봉건 대 반봉건 이런 무식한 도식 구도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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