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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대한민국의 50-70년대 (4): 해방과 함께 텅빈 경성제대 의학부

by 초야잠필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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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해방 직후 상황 두 가지를 설명하였다. 하나는 일반 국민들의 문맹률. 무려 네 명 중 세 명이 문맹 상태였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면 좀 배웠다는 식자층은 달랐느냐.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선 반도 내에는 대학 숫자가 절대적으로 모자랐고 이 때문에 30년대 부터는 아예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조선인도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일본 유학생 수가 급증하는 것은 일차적인 원인은 조선 내에 쓸 만한 대학이 별로 없다는 데 있었다 할 수 있다.

경성제대는 이때 이미 있었지만, TO가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누어 뽑았고 입학생도 일본인이 더 많았다.

당시 조선에 살던 일본인과 조선인의 상대적 비율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왜곡된 구조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경성제대를 나와 봐야 어차피 모교의 교원이 될 수 없는 이상, 조선에서 최고학부를 나오기 위해 연연할 필요가 많지 않은 것이다. 

돈이 좀 있는 집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30년대에 나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생 비율.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더 많이 뽑힌 적이 한번도 없었다. 경성제대 설립 이후 의학부를 졸업한 조선인은 겨우 314명으로 연평균 20명 정도였다. 박사 등록자는 더 적었고, 이는 일차적으로 박사를 받아도 대학교원으로 임용될 가능성이 크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조선인들은 대부분 개업의의 길을 택했다. (1992년: 기창덕: 경성제대의학부: 의사학 1권 1호에서 인용)
경성제국대학의 역대 조선인 교수는 이렇게 딱 넷이다. 윤일선과 고영순은 의학부 조교수로 발령받았고 발령 후 1년만에 다른 대학 교원으로 옮겼다. 윤태동이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활동한 것은 4개월 정도이며 해방되기 1달전에 김종원이 이공학부 교수로 발령받았다. 김종원은 해방 이전 경성제대 유일한 조선인 교수로 해방 이후 서울대 교수로 그대로 이어진 유일무이한 분이다. (위키 한국판)


이 때문에 해방 당시, 경성제대 의학부는 완전히 텅텅 비게 되었다.

의학부에는 조선인 교수가 단 한명도 없었고, 일본인 교수진은 해방과 함께 일본으로 철수하였기 때문이다.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상전벽해로 변했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필자가 소속한 교실도, 해방당시 부임한 교수 세 분 중 두 분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이며 한 분은 니혼의대 출신이신데, 앞 두 분은 해방 되는 순간, 이화여전 교수로 재임 중이었으며 니혼의대 출신 교수님은 아직 귀국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안다.

이 세 분이 사실상 빈집이 되어 버린 서울대로 들어와 해방 이후 한국 의대 교육을 이어 받게 된다. 

이러한 우리 교실 상황은 의과대학 안에서도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해방 이후 임상 교실들은 개업의로 활동하던 분들도 교수로 많이 들어왔다.

그나마 이러한 사정은 의대는 서울대 다른 단과대학에 비해 훨씬 좋은 편이었다.

인문대 어떤 학과는 해방 직후 교수로 들어온 분 중에는 대학 졸업 후 회사에 다니다 들어온 분도 있었다.

한 단과대학 학장으로 임명된 분은 해방 전 전문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모두 철수하자 해당 전문학교 교장이 되었고, 이 전문학교가 국대안으로 서울대로 바뀐 후에는 그 대학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6.25때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일권은 참모총장이 되었던 당시 33세였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대학에도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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