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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024

일제시대 양주동 선생의 경우 이제 "일제시대~~의 경우" 마지막 사례이다. 양주동 선생의 예를 보겠다. 위키에는 양주동 선생에 대해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 이렇게 해놓았다. 그런데 이 기술은 누락된 부분이 많다. 우선 중동고보는 앞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중학과정으로 와세다대 영문과로 바로 진학이 불가능하다. 아마 뭔가 빠진 이력이 있을 것이다. 한편 나무위키에는 "1903년 경기도 개성군에서 태어나 중동학교를 마치고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영문과로 전과하여 1928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이라고 되어 있다. 이 프로필도 누락분이 있다. 중동학교를 마치면 불문과건.. 2023. 3. 26.
일제시대 교육과정 착시의 이유 앞에서 쓴 것처럼 일제시대 학력을 우리가 볼 때, 고등보통 (고보)를 고등학교,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인지하는 일이 많다. 이때문에 일제시대 고보, 전문학교 졸업생들을 고등하교, 대학 졸업생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해방이후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그 하위교육기관은 고등학교 (혹은 중학)으로 재편제하면서 나오는 착각이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당시 조선인 학력을 보면, 보통학교--양정고보--보성전문--메이지대 전문부 (법학졸업) 손기정 선생 이런 학력처럼, 양정고보, 보성전문을 각각 고등학교, 대학으로 인지하면 보통학교와 고보 사이에 중학과정이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때문에 전문학교를 졸업해서는 절대로 "대졸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공부한 사람 대부분이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30년대 이후.. 2023. 3. 26.
일제시대 박정희 대통령의 예 다음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 예를 보자. 이 양반 학력은 구미보통학교-대구사범-만주국육군군관학교(예과)-일본육사편입 (본과)이다. 박 대통령의 경우 "대구사범"을 나왔는데, 이 학교는 보통학교 졸업생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로 "중학교 과정"에 해당했다. 당시 조선 땅에는 "고등사범"이 없었기 때문에 설치된 모든 "사범학교"는 중학교 과정이었다. 따라서 대구사범을 포함한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할 수 있었는데, 학력으로는 고보 졸업자와 동등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은 바로 진학이 안 되는 학력이라고 할 수 있고, 고등학교나 고등사범, 전문학교 등을 추후 졸업해야 대학 진학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현실적으로 고등학교와 고등사범은 조선에 없으므로 남은 선택지는 "전문학교" 외에는 없었다고 할 수.. 2023. 3. 26.
일제시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예 다음으로 일제시대 최규하崔圭夏(1919~2006) 대통령의 이력을 보자. 이 분 학력을 보면 이렇다. 원주보통학교-경성제일고보-도쿄고등사범-만주국립대동학원 앞에 손기정 선생의 예에서 언급했듯이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최 대통령이 진학한 학교는 경성제일고보로 "중학교"과정이다. 그 다음으로 "고등학교" 과정으로 "도쿄고등사범"을 들어갔는데, 이때 최 대통령은 "경성제대 예과"에 동시 합격되었었다고 한다 (대학 예과와 고등사범, 고등학교는 동급으로 졸업후 대학본과로 진학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레벨이다). 이 "고등사범"이라는 학교는 "고등학교"가 조선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땅에는 없던 고등 교육기관이다. 이는 경성사범, 대구사범 등 사범학교와는 다른 것이다. 조선땅에 있던 사범학교는 "소학교"를 졸업하면.. 2023. 3. 25.
일제시대 손기정 선생의 예 해방 전 식민지시대 교육제도는 해방 이후가 되면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하면 해방 전과 해방 이후에 정체성 변화가 크기 때문에, 해방 전의 고등학교를 "구제 고등학교"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구제중학교"도 있고 "구제전문학교", "구제대학"도 있다. 교육기관 앞에 "구제舊劑"라는 말이 붙으면, 일제시대 일본의 교육제도 아래 편성되어 있던 학교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일제시대 조선인 대상 교육 기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우리가 착각을 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그 당시 실체보다 매우 부풀려 인식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것을 하나 써보겠다. 우선 "고보高普"는 고등학교가 아니다. 이건 사람들이 가장 착각하는것 중의 하나인데, "고보"라고 하면 일제.. 2023. 3. 25.
[보유] 미국의 19-20세기 문맹률 미국의 문맹률은 1870년대에 백인은 이미 10프로 내외였다. 다시 말해서 10명 중 9명은 글을 읽었다는 뜻. 재미있는 것은 흑인도 미국은 1940년대가 되면 문맹률이 10프로 내외가 되었다. 60년대 흑인민권운동이 왜 발생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라 할 것이다. 1945년 당시 조선의 문맹률 75프로가 얼마나 높은 숫자였는지 잘 보여주는 지표이다. 2023.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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