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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700

일본의 옛 무덤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모식도 이런 시도가 국내서는 몇 군데 박물관을 중심으로 시각화가 이제 겨우 시도되고 있지만 우리는 멀었다. 일본에선 무엇보다 이런 작업이 일찍 이뤄졌고 나아가 역사 애호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시각화가 진척한 상황이다. 한국에선 무엇보다 고고학도라 일컫는 이 분야 직업적 학문종사자들이 이런 일은 쪽팔리다고 전연 하지 않는다. [도1]은 횡혈식橫穴式 석실분石室墳 모식도다. 횡혈식 석실분은 글자 그대로는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무덤방[室]을 옆으로 누인 가로[橫] 형태로 구멍 혹은 터널처럼 만든 것을 말한다. 글자 그대로는 그런 뜻이어야 한다. 한데 엉뚱하게도 저에서 말하는 혈穴은 무덤방이 아니라, 그 무덤방으로 통하는 연도羨道라는 길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국과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쓰고 있다. 즉, 그 통로가 터널 형태라.. 2024. 3. 17.
시체 얼굴에 쏟아부은 일본열도 수은과 한반도 운모 나라시교위 매장문화재센터가 한창 발굴 중인 4세기 후반 무렵 고분시대 부웅환산고분富雄丸山古墳이라는 무덤 통나무 목관 내부 노출 상황이다. 통나무를 길쭉이 모양으로 반토막 낸 다음 수박 속을 걷어내듯이 대롱 모양으로 만든 다음, 각각 아랫동과 윗동으로 썼으니, 내부는 삼단으로 격벽판을 고정해 분리했다. 중앙 부분이 주실主室이라 해서 시신을 묻은 곳이다. 선혈이 낭자한 듯한 저 바닥이 시신 머리가 있었던 곳이요, 저쪽 반대편 구리거울 석점이 나온 데가 발치에서 가까운 지점이다. 저 수은은 바닥에 고루 깔린 모양새지만, 얼굴 쪽에 집중해서 퍼부었다. 저것이 한반도로 건너오면 수은보다는 운모를 쓴다. 운모를 얼굴을 중심으로 바케스로 갖다 부었다. 운모? 수은? 왜 운모이고 수은이겠는가? 한반도는 수은을 잘 쓰지.. 2024. 3. 15.
홍사준이 적은 1963년 정림사지 오층석탑 정림사지 5층석탑의 사리기(홍사준의 1963년 기록) 1963년 12월월 중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세밀하게 실측할 기회를 얻었고, 몇 개 부분에서 의외의 새 사실을 알게 되어 소개한다. 1. 지대석 4면 외곽으로 돌린 석재는 지대석이 물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옥개석 모서리에 우동을 설치하였다. 3. 제4층 탑신 남측면 두께 13㎝ 판석으로 가린 사리공이 있음을 알았다. 당초 탑을 계획할 때 탑신의 높이 23㎝, 길이 60㎝, 폭 43㎝의 단형으로 사리공을 만들고, 그 내부의 네 모서리를 안쪽으로 둥글게 도려낸 모양이다. 유물은 없었다. 제4층 옥개받침이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있어 일제강점기에 사리기는 분실된 것이 아닌가 한다. (홍사준) 홍사준, 1965, 부여 .. 2024. 3. 15.
과거를 보는 시점이 다른 서양과 한국 고고학 관련 발굴소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서구와 한국의 확연한 차이점이 있다. 서양에서는 보통 어느 시대 어떤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제목에 내세우는 일이 아주 드물다. 대신 서구 언론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지금으로부터 얼마전 어떤 유적 유물이 발굴되었다는 식으로 전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거의 다 삼국시대 어떤 유물 유적, 구석기시대 어떤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제목을 앞세운다. 둘 중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고는 하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가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지금으로부터 얼마전 운운하는 제목은 그렇지 아니한 제목에 견주어 철저히 현재의 관점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어느 시대를 앞세우는 제목은 말할 것도 없이 이른바 연구자 관점에서의 시각이다. 왜? 연구자한테는 지금으로부터 얼마전 .. 2024. 3. 14.
파르싸[페르세폴리스]에 나타난 이쉬타르 성문 파르싸(Persepolis)에 나타난 이쉬타르 성문 그림에 보이는 황소와 용 부조는 유명한 바빌리(Babylon)의 이쉬타르 성문 장식이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부조가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파르싸(Persepolis)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건축자들이 바빌리의 이쉬타르 성문을 본 따 만들었거나, 바빌리 건축자들을 동원하여 지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한다고 한다. Alireza Askari Chaverdi, Pierfrancesco Callieri, Emad Matin, "The Monumental Gate at Tol-e Ajori, Persepolis (Fars): New Archeological Data," Iranica Antiqua LII (2017): 251. *** 이상 .. 2024. 3. 14.
내치와 외치로 관부官府를 나누어 다스린 거란 국가로서의 거란이 어떤 통치체계를 마련했는가를 살피면, 내치와 외치를 부러 구별하려 한 흔적이 역력하다. 경찰과 군대라는 현대 국가 관점에서 보면 내치란 말할 것도 없이 경찰 관련 사무요, 외치란 외부를 통제하기 위한 군대를 말한다. 이 두 가지 체계를 일부러 나누어 다스리려 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거란은 그 주축인 거란족과 이런저런 이유로 유입된 한족漢族 중심 외부를 동시에 통제해야 했다. 이에서 두 가지 층위의 통제책을 쓰는데, 거란은 거란 본래의 유습에 기초한 방식을 쓰고, 한족은 한족에 중국식 통제 방식을 구사했다. 태종太宗에 이르러 중국 제도를 겸용하여 관직을 남南[중국]과 北[거란]으로 나누었으니 국제國制로 거란을 다스리고 한제漢制로는 한인漢人을 다스렸다. (요사遼史 권45.. 2024. 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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