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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2416

70년대에 부활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증보판 주인공은 무령왕릉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또 지금 봐도 사상 유례없는 호화양장의 거질 조선 고고미술 씨리즈다. 총기획은 조선총독부. 소위 식민사관의 본산과도 같은 뿌리로 분류된다. 조선 식민통치의 부산물이며 그 효율적인 관리를 위한 목적은 하늘이 두쪽 나도 부인할 수 없다. 문화재관리정책 치고 그렇지 아니한게 있던가? 일제 패망과 더불어 뒤안길로 사라진 이 고적도보가 느닷없이 1970년대에 부활한다. 똑같은 표지에 똑같은 양장으로 증보판을 낸 것이다. 총감독은 아리미쓰 교이치..유광교일有光敎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고적조사에 다년간 종사한 자로써 103세인가를 살고는 몇년 전 사망했다. 이 증보판 필자가 누구인지 아는가? 70년대에 부활한 조선고적도보 증보판 필자가 누군 줄 아는가? 이 증보판에.. 2021. 5. 19.
[천안 천흥사論] (1) 만남의광장 봉선홍경사와 톨게이트비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191번지 일원에 소재하는 천흥사지天興寺址라는 절터가 외부로 알려진 동기를 보면 첫째 여전히 현장을 지키는 두 문화유산, 곧 천흥사지 오층석탑과 천흥사지 당간지주, 둘째 제자리를 떠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천흥사지 동종 크게 두 종류로 말미암는다. 전자 석탑과 당간지주는 이곳에 절터가 있었음을 웅변하며, 아울러 그 분포양상을 대략 짐작케 하는 반면, 후자는 천흥사라는 절과 그 동종을 만든 내력을 짐작케 하거나 알려준다. 전자는 꼭 석탑과 당간지주가 아니래 해도, 이번 발굴조사 이전까지 과수원으로 변한 주변으로 이 일대 어느 시기에 절과 같은 대규모 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는 각종 흔적이 농후하게 발견됐다. 여타 옛날 절이 그렇듯이 천흥사 역시 그 정확한 .. 2021. 5. 18.
산성이 무에 소용인가? 북한산서 소환한 임경업과 윤선도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산성 무용론이 봇물터지듯 한다. 산성을 놔두고 적들이 횡하니 지나치기 일쑤였으니 말이다. 백마산성 임경업이 그 결정적 단초였다. 호언장담.. 하지만 철기군은 잘 있으레이 한마디 남기곤 한양으로 휑하니 날았다. 멍 때린 임경업이 할 일은 암것도 없었다. 산성이 효용성을 지닐 때는 첫째, 적이 쌈을 걸어와야 하고 둘째 걸어오지 않고 지나 쳐도 산성에서 기어나와 끊임없이 적 배후를 교란할 때다. 하지만 조선군은 산성에만 기어박혀 암짓도 하지 않았다. 산성이 효용성을 지닌 유일한 곳이 고갯길. 이곳은 적들 역시 지나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산성 무용론엔 정치투쟁도 점철한다. 윤선도는 대표적 산성 무용론자였다. 산성이 완전 폐기되기는 조선말 대한제국이었다. 실제 페기된 것이며 아무짝에도.. 2021. 5. 8.
유길준의 측량학교 근대는 빗금에서 선으로의 이동이다. 프론티어 frontier 와 보더라인 borferline 의 차이거니와 Borderline을 긋기 위한 필요조건이 측량 메저먼트다. 유길준이 하필 측량학교를 세웠겠는가? 수탈?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2018. 5. 6) *** 누누이 지적했듯이 근대국가는 측량과 인구센서스 이 둘을 축으로 그릇을 만든다. 측량은 경계의 확정이라 그 경계는 모호함이 없어야 한다. 이 모호함은 빗금에서 탄생하니 그 모호는 선을 그어서 쟁투의 빌미를 차단한다. 이 측량을 기반으로 지도가 완성된다. 인구센서스는 결국 징발을 위한 기초단위다. 세금을 얼마를 거두며 군대 노동력은 어찌 징발할 것인지는 성별 연령별 통계가 있어야 한다. 이를 수탈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했다. 그 주체가 대한제국이건.. 2021. 5. 6.
소화昭和 연간 검근장檢斤帳 소화 연간 창평 검근장檢斤帳 색다른 문서다. 개인 소장인데 담양군에 기증하기로 했단다. 검근장이란 곡물을 저울질한 문서다. 지금도 시골에선 무게를 근으로 재서 몇 근 한다. 소화 연간에 가마니에 담아 검근하여 거래하도록 입법화했다. 이는 그 사정을 증언하는 문서다. 2021. 4. 30.
경부자은輕部慈恩, 고적조사 손길을 벋어난 공주고고학의 제왕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손길이 공주에는 생각보다 뻗치지 아니했다. 그 자리를 가루베 지온 경부자은 輕部慈恩이 헤집고 들어갔다. 메이지대학 한문학과 출신인 그는 조선으로 넘어와 애초에는 평양 숭실로 갔지만, 그 일대는 총독부가 장악해 정착하지 못하고 그 꿈을 공주에서 펼치기로 하고 남하했다. 놀랍게도 그의 조사는 모두가 불법이고 도굴이었다. 더 놀랍게도 그런 불법과 도굴을 그는 조사보고서로 남겼다. 그의 조사는 도굴과 발굴 그 어중간을 보여준다. 싫건좋건 웅진백제고고학은 그의 이름없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웅진고고학 백제고고학의 비조다. 그가 남긴 글은 이 두 책으로 정리됐으니, 작은 것이 생전에 나온 것이요 후자가 유저다. 나는 이 두 책을 국립민속박물관 자료실에 소장 중인 판본을 이용하곤 했으니, 불편.. 20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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