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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555

사마정司馬貞과 《사기색은史記索隱》 사마정司馬貞은 사마천司馬遷 불후의 저작인 《사기史記》에 대한 해설 혹은 주석으로 시도한 완성물인 《사기색은史記索隱》 저자이나 이상하게도 행적은 불비하기 짝이 없다. 생년은 물론이요 몰년도 모조리 미상이다. 관적貫籍은 회주懷州 하내河內이며, 당 현종玄宗 개원開元 연간(713~741) 초기에 국자박사國子博士를 지냈으며, 이후 윤주별가潤州別駕와 굉문관학사宏文館學士를 지낸 이력 정도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史記索隱》 외에 《補史記보사기》가 있다고 하며, 《전당문全唐文》 卷402에 그의 산문이 수록된 정도다. 이런 가운데 그의 행적은 《신당서新唐書》 卷132 유자현전劉子玄傳에 찔끔 보이며, 그 외 북송시대 도서목록집인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卷4에도 역시 간략한 기술이 나온다. 그 불후의 성과로 꼽히는 사기색.. 2018. 3. 9.
두헌(竇憲. ?~92)과 당고지금(黨錮之禁) 두헌(竇憲)은 字가 백도(伯度)이며 부풍(扶風) 평릉(平陵),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이다. 두융(竇融)의 증손으로 후한시대에는 외척으로서 要職을 역임했다. 후한 建初 2年(77), 황제 장제(章帝)가 두헌의 누이동생을 황후로 세우자 외척으로서 동생인 두독(竇篤)과 더불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을 사서에서는 “賞賜累積, 寵貴日盛, 自王․主及陰․馬諸家, 莫不畏憚”이라 적었다. 황제가 내린 상이 쌓이고 총애가 날로 깊어지니 왕 이후 권세가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원(永元) 元年(89), 竇憲은 刺客을 보내 太后 총신인 유창(劉暢)을 살해하고는 그 죄를 채륜(蔡倫)에게 덮어 씌우려 하다가 나중에 일이 발간되어 宮廷에 감금됐다. 후한서 두융전(竇融傳.. 2018. 3. 9.
신라 금석문의 주소지 공개와 호구조사 포항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그 자리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울진 영일 냉수리비는 얼마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였다. 그 건립시기가 최종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서기 503년, 지증왕 4년이라고 많은 이가 받아들인다. 이 영일 냉수리비에는 신라인 이름 얼추 25명이 나온다. 과거 왕이 2명이요, 현재 살아있는 갈문왕이 1명, 기타 이 갈문왕과 더불어 진이마촌이라는 동네에서 벌어진 아마도 재산 관련 분쟁 판결에 관여한 다른 신료 6명, 그리고 아마도 이들의 부관이었을 공산이 큰 실무 관료 7명, 그리고 비문 작성에 관여했을 법한 실무관료, 그리고 진이마촌 행정책임자인 촌주 등이다. 이들 25명에게는 모두 그 주거지를 밝혀놓았다. 심지어 신라왕과 갈문왕조차도 주거지를 다 밝혀놓았다. 이에 .. 2018. 3. 8.
긴장을 계속하는 나당관계 "주인이 자기 다리를 밟으면 개가 주인을 무는 법입니다." 다시금 찬찬히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읽다가 마주한 대목이다. 백제를 멸한 당이 이번엔 함께 백제를 정벌한 신라를 치려하자, 이를 감지한 신라 조정에서 대처 방법을 두고 격론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군사적 대응에는 미온적인 태종무열왕 김춘추를 겨냥해 김유신이 한 말이다. 이 대목이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中)에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당이 백제를 멸하고는 사비(泗沘) 땅에 진영을 치고 신라 침공을 은밀히 도모했다. 우리 왕이 이를 알고는 여러 신하를 불러 대책을 물으니, 다미공(多美公)이 나와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을 의복을 입혀 백제인으로 꾸며 역적 행위를 하게 하면 당군이 반드시 이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 틈을 타 싸움을 벌이면 뜻을 이룰 수.. 2018. 3. 7.
잡간迊干, 혹은 잡찬迊飡과 소판蘇判 ‘迊’이라는 글자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淸代에 완성한 《강희자전康熙字典》을 보면, 이 글자를 【酉集下】 【辵部】에 배치하면서, 그 발음은 《광운廣韻》을 인용해 ‘子와 答의 반절(子答切)’이라 하고, 이어 《집운集韻》을 응용해서는 발음은 ‘作答切’이라 하면서, “帀라는 글자와 같다. 두루 갖춘다(혹은 두른다)는 뜻이다. 止를 거꾸로 세워 帀이다. 더러 ○라고 쓰기도 한다(同帀。周也。从反之而帀也。或作○)”고 했다. 나아가 《正韻》을 인용해서는 “세속에서는 잘못 써서 匝이라 쓰기도 한다(俗譌作匝)”고 했다. ○는 자판에서 글자가 지원되지 않지만 ‘迊’이란 글자에서 책받침 안 글자 ‘帀’이 ‘市’인 글자다. 이로써 보건대 ‘迊’이라는 글자는 발음으로는 ‘잡’이고, 뜻은 ‘周’, 곧 ‘빙 두.. 2018. 3. 7.
월함산(月含山) vs 함월산(含月山) vs 토함산(吐含山) 이 석가탑중수기는 내가 2005년 9월 14일에 '불국사 석가탑 중수기 발견, 보존처리 중'이라는 제하 기사로 보도함으로써 세상에 존재를 알린 데다, 그에 대한 본격적인 문서 검토 또한 내가 가장 먼저 손을 댔으니, 2007년 3월 신라사학회가 개최한 제59차 학술대회에서 안승준과 공동으로 발표한 '釋迦塔(无垢淨光塔) 重修記에 대한 초보적 검토'라는 글이 그것이다. 이 글은 직후 신라사학회 기관지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국립박물관은 이 보도에 할 수 없이 전체 중수기 중 달랑 석장만 공개했거니와, 첨부사진은 그 석장 중 하나이니, 이 석장짜리로 진행한 검토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였다. 그럼에도 나는 이에서 적지 않은 발견을 했다고 자부했거니와, 그러는 과정에서 무척이나 의아스런 대목이 고려 초기 현종시대.. 2018. 3. 6.
묘자리 파다가 발견한 고려시대 무덤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태동하기 전, 가끔 그 전초로 볼 만한 일이 있었으니, 그 남상을 이루는 행위는 말할 것도 없이 도굴이다. 하지만 도굴이 아니라 해도, 실로 우연한 발굴이 더러 있었으니, 조선말 영의정까지 역임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제33권 화동옥삼편(華東玉糝編)에 '팔각경(八角鏡)'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글 역시 그런 사정을 보여준다. 김상고당(金尙古堂 김광수(金光遂))의 손자 김노종(金魯鍾)이 그 형 태인군(泰仁君) 김만종(金萬鍾)을 장단(長湍) 산속에 장사 지내려고 묏자리를 파다가 옛사람의 순장물과 송(宋)나라 동전을 발견했다. 송나라 동전이 수백 개인데, 모두 원풍통보(元豐通寶)이니 곧 청묘전(靑苗錢)이었다. 팔각경 한 면에 ‘호주진정석념이숙조자감인면청여명.. 2018. 3. 1.
“김유신, 당신이 밉소” 천관녀의 원망 고려 무신정권 때 문사 이인로李仁老(1152~1220)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 상·중·하 전 3권 중 中卷에 다음과 같이 일렀다. 김유신金庾信은 계림인鷄林人이다. 사업事業 혁혁赫赫하니, (그런 사업 내용은) 국사國史에 펼쳐져 있다. 아이 때 모부인母夫人이 매일 엄훈嚴訓하면서 망령되게 교유交遊하지 못하게 했다. 하루는 우연히 여예女隸 집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그 어미가 그를 면수面數(면책)하여 이르기를 ‘나는 이미 늙었으니 주야로 네가 성장하여 공명功名을 세워 임금과 부모에게 영화가 있기를 바랐더니, 지금 너는 술파는[屠沽] 애들과 음방淫房과 주사酒肆에서 유희遊戱하느냐’ 라고 하고는 호읍號泣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즉시 어미 앞에서 스스로 맹서하기를 다시는 그 집 문을 지나지 않겠다고 했다. 하루는 술에.. 2018. 2. 27.
작은아버지에게 쫓겨난 대우황자大友皇子의 노래 두 수 667년, 한반도가 신라에 의한 반도 통일 전쟁으로 요동을 치던 그 시절. 신라가 당군을 끌어들여 동맹국이라 할 수 있는 백제를 멸한 것이 그로부터 7년 전인 660년. 망가진 백제 사직을 돌려놓겠다며, 왜의 여주(女主)로서 아들인 中大兄황자에 의해 두 번째로 왕위에 옹립된 이가 제명(齊明. 사이메이) 천황. 제명은 두 번째 재위 5년째인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자, 이듬해인 661년(제명 7년), 군대를 이끌고 한반도로 진군하겠다며 아들 중대형과 함께 서울을 떠나 츠쿠시(축자. 筑紫)에 집결한다. 하지만 항전을 기다리던 제명이 츠쿠시에서 사망하자, 이에 中大兄이 재위에 오르니 이가 천지천황(天智天皇. 텐치천황)이다. 실제 그의 즉위는 661년이나, 즉위 원년은 이듬해로 삼는다. 이는 前王 재위 말년과 .. 2018. 2. 27.
경복궁(景福宮)과 경복전부(景福殿賦) 지금까지 만난 한문 원전 텍스트 중에 나를 질려버리게 하고, 나 스스로는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내 머리가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가 라고 의심케 만든 두 부류가 있다. 1. 최치원 사산비명(四山碑銘)이니, 최치원이란 사람이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알 터이고, 사산비명이란 치원이가 왕명을 빙자해 돈 받고 이 인간은 매우 매우 훌륭하다고 선전해 준 비문을 말하는데, 당시 신라 저명한 고승이 죽은 다음에 그 비명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써준 것이 바로 사산비명이라. 이들 비명이 각각 자리잡은 곳이 네 山이라 해서 저리 일컫는다. 한데 이 사산비명은 문체가 사륙변려문이라. 이거 한문 시간에 한 두 번 잠깐 보고는 지나치기 마련인데, 사륙변려문이란 4글자와 6글자가 세트가 되는 것은 물론 그런 세트와 세트끼리로 照.. 2018. 2. 27.
쇠돌 엄마 기슈? 서가를 채운 책 중에는 대학시절에 사서 모은 게 일부나마 남아 있으니, 며칠 전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서가 한 켠에 저번 이삿짐 싸서 이곳으로 옮겨올 때 뭉탱이로 묶인 그 빛바랜 책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하도 먼지가 덕지덕지 끼어 있어 작심하고 책을 닦았다. 잦은 자취생활, 1986년 서울 유학 개시 이후 언젠가 내가 이사한 횟수를 헤아려 보았더니 18 비스무리한 숫자가 나오더니, 그처럼 잦게 주거를 전전하는 동안에도 용케도 살아남아 지금에 이르고 있는 빛바랜 책들이다. 지금은 헌책방에나 가야 재수 좋게 만나게 되는 것들인데, 개중 한 책을 보니 1985년 글방문고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한 ‘글방문고’ 시리즈 중 하나인 ‘동백꽃’이라는 단편소설집이라. 금광에 미쳐 요절한 강원도 춘천 출신 소설가요, 내 .. 2018. 2. 26.
술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술을 끊었더니 중국 북송(北宋)시대를 살다간 광세(曠世)의 박학이요, 절세(絶世)의 천재로 심괄(沈括·1031~1095)이란 괴짜가 있었으니, 왕안석(王安石)이란 사람이 일으킨 일대 국가개혁 프로젝트인 변법(變法)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참여한 그가 저술한 문헌으로 지금도 전하면서 널리 읽히고 있는 명저로 《몽계필담》(夢溪筆談)이 있을 지니라. 내 오늘은 이 땅의 주당(酒黨)들에게 이 책 한 구절에 수록된 어떤 고주망태 일화를 소개하고자 하노라. 본론에 들어가기 전, 내 주위로 아래에서 말하는 주당과 비슷한 부류가 많으니, 폭탄주에 찌들어 사는 원시인들이 아직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더러 포진하고 있을 지니, 이 자리에서 내가 선배가 대부분인 그들에게 이제부턴 인생 똑바로 살라고 훈계는 더 이상 못하겠노라. 대신 나.. 2018. 2. 26.
완당 김정희가 돌아가시매 : 조희룡의 만가 완당학사(阮堂學士)는 壽를 누리기를 71세이니 500년만에 다시 온 분이라네. 천상에서는 일찍이 반야(般若)의 業을 닦다가 인간세(人間世)에 잠시 재관(宰官)의 몸을 나셨네. 하악(河嶽)의 기운 쏟은 적 없으나 팔뚝 아래 금강필(金剛筆)은 신기(神氣)가 있었네. 무고무금(無古無今)한 경지로 별스런 길 열었으니 정신과 재능의 지극함이요 모두 종정운뢰(鍾鼎雲雷)의 문장이라네. 글씨 때문에 문장이 가리운 왕내사(王內史), 그와 천고(千古)와 같은 경우라네. 그 글씨의 흉중(胸中)의 구파(九派)와 교룡(蛟龍)의 노숙함은 주옥 같은 전분(典墳)과 진한(秦漢) 문장의 온축이라네. 승평(昇平)의 시대를 문채나게 함은 응당 이유가 있었으니 어찌하여 삿갓에 나막신 차림으로 비바람 맞으며 바다 밖의 문자를 증명했는가? 公.. 2018. 2. 26.
조희룡이 증언하는 김홍도와 그의 아들 조선후기 최대 화가로 꼽히는 단원 김홍도. 하지만 그 일생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가장 신빙성 있는 기록이 아래에 소개하는 조희룡이라는 당시 사람의 증언이다. 조희룡(趙凞龍·1789~1866)은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라는 사람과 친분이 많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조희룡의 문집 중에 '김홍도전'(金弘道傳)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김홍도(金弘道)는 字가 사능(士能)이요 號는 단원(檀園)이다. 아름다운 풍채와 태도에 마음은 활달하고 구애됨이 없어 사람들이 신선세계에 사는 인물이라 했다. 그가 그린 산수(山水), 인물(人物), 화훼(花卉), 영모(翎毛)는 묘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특히 신선(神仙)을 잘 그렸다. 준찰(?擦), 구염(句染), 구간(軀幹), 의문(衣紋)을 앞 사람들에게.. 2018. 2. 26.
스스로 눈을 찌른 칠칠이(七七이) 화가 최북(崔北) 최북은 字가 칠칠(七七)**이니 자 또한 기이하다. 산수와 가옥 및 나무를 잘 그리니 필치가 짙고 무게가 있었다. 황공망(黃公望)을 사숙(私淑)하더니 끝내는 자기의 독창적인 의경(意境)으로 一家를 이루었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다. 사람됨이 격분을 잘 하며 외곬수였으며 자잘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집에서 한 달관(達官)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달관이 최북을 가리키면서 주인에게 묻기를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姓이 뭔가?”라고 하니 최북은 얼굴을 치켜들고 달간을 보면서 “먼저 묻건대 그대의 성은 무엇이오”라고 했다.최북의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른 그는 갑자기 “천하의 명사(名士)인 내가 천하의 명산(名山)에는 죽는 것이 족하.. 2018. 2. 26.
이용휴가 김홍도 초상화를 보고서 김홍도 초상화에 부친 찬가〔對右菴金君像贊〕 남이 남의 초상화를 그리면 그 사람의 고움과 추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반면, 내가 나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면 내 주견에 제약을 받는다. 그런 까닭에 김군金君이 신군申君을 시켜 자기 얼굴을 그리도록 했다. 문인은 자기 글에 서문을 쓰지 않고, 명사는 자기 자신의 전기傳記를 쓰지 않는 옛날의 법에서 나온 생각이다.세상에서 재능있는 예술가로서 김군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예술가로서의 재능 때문에 김군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이제 김군의 초상화를 보니 영롱한 옥인 듯, 향기로운 난초인 듯하여 듣던 것보다 훨씬 나은 인물이다. 이야말로 그저 화가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참으로 온아溫雅한 군자로구나.그랬더니 김경오金景五와 정성중鄭成仲이 이렇게 말했다... 2018. 2. 26.
김홍도의 집에 부친 이용휴의 글〔對右菴記〕 하늘이 사물을 탄생시킬 적에는 이치를 그 형상 속에 깃들게 하는 법이다. 그러고서 가장 신성한 성인에게 하늘을 대신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교화를 널리 펴게 하니, 그러한 말과 교화가 담겨 있는 곳이 바로 경서(經書)일 지니라. 그러나 말이란 모름지기 문자의 힘을 빌어서야만 전달되므로 하늘은 또 창힐(蒼?)을 시켜 문자를 만들게 했다. 문자는 처음에는 형상을 본떠 만들었기에 그 활용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하늘은 또 이번에는 사황(史皇)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렇게 그림과 문자가 서로 어울리자 비로소 말과 교화를 완벽하게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숱한 세월을 거치고 드넓은 세상을 확장하는 동안, 문자는 늘 세상에서 제자리를 지킨 반면, 그림은 나타나기도 하고 깊이 숨기도 해서 ‘빈풍도’(?風.. 2018. 2. 26.
200년만에 빛을 본 《대동운부군옥》 내가 경탄해마지 않는 조선시대 저술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이 있다. 우리 교육이 대개 그렇듯이, 이 책에 대해서도 분명 중고교 역사 수업 등지에서 적어도 이름 한 번은 들어봤음직하거니와, 그럼에도 막상 그 책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우리 교육이 이 모양이다. 이 《대동운부군옥》은 우선 ‘대동/운부군옥’이라고 끊어 읽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대동大東의 운부군옥韻府群玉이라는 뜻이다. 大東이란 말할 것도 없이 東을 존칭한 것이니, 동쪽 중에서도 큰 동쪽이라는 뜻이라 여기서 동쪽은 조선을 말한다. 조선이 조선을 자칭하는 용어가 大東이라, 왜 우리가 中이 아니고 東이냐 하는 반문은 하지 말기 바란다. 中國을 천하 중심으로 놓았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에게 그걸 따져 무엇 하겠는가? 그러니 대.. 2018. 2. 26.
판타지를 즐긴 실학자(심경호 글) 판타지를 즐긴 실학자(펀글. 심경호)출처 : 실학산책, 제19호 (2006.10.18) 판타지를 즐긴 실학자 심경호(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연암 박지원은 시를 별로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영대정잡영(映帶亭雜詠)」에 「수산해도가(搜山海圖歌)」라는 기이한 제목의 장편시를 남겼다. 박지원은 언젠가 큰 형 박희원(朴喜源, 1722-1787), 종제 박수원(朴綏源, 1738-1811) 및 이덕무와 현원(玄園)이란 동산에 노닐면서 거대한 크기의 를 펼쳐 놓고 감상하였다고 한다. 시의 서문은 이렇다. “여름날 형님을 모시고 종제 이중(履仲, 綏源)과 함께 덕보 무관(이덕무)과 약속하고는 현원에 노닐었는데, 각각 명품[翫]을 하나씩 내놓고 비교하기로 하였다. 이 그림 축의 길이는 거의 화살의 비거리 만하였다. 동.. 2018. 2. 26.
벼루광 유득공(안대회 글) 다산연구소 발간 '실학산책'에 수록된 글을 원필자인 안대회 교수의 허락만 얻어 전재한다. 올해(2007)는 마침 유득공 사거 200주기가 되는 해다. 벼루광 유득공 안대회(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의 옛 역사에 관심이 많아 《발해고》를 비롯한 저술을 여럿 남긴 유득공(柳得恭)은 학문적 관심사와 취미가 다양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에는 벼루도 포함된다. 그는 벼루를 많이 가지기도 했고, 또 조선 벼루의 역사를 정리하여 《동연보(東硯譜)》란 저술을 짓기도 했다. 자연 먹에도 관심이 깊었다. 하기야 어느 문인치고 벼루와 먹에 무관심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뿐, 벼루의 요조조모를 조사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수준에 나아간 선비는 거의 없었다. 벼루에 관한 다양한 글 남겨 유득공은 유달랐다. 벼루를 소재로.. 2018. 2. 26.
은행나무 꼬랑내 공자를 추숭하는 유교 학교를 흔히 행단(杏壇)이라 하거니와, 이는 공자가 제자들을 杏나무 아래서 교육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이런 공자학교 마당에는 杏나무를 심는 일이 많아, 우리네 서원이나 향교 같은 마당에서 오래된 은행나무를 만나는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한데 杏이라는 글자는 언제나 논쟁을 유발했으니, 다름 아니라 은행나무라는 뜻도 있고, 아울러 살구나무를 의미하기도 한 까닭이다. 그래서 은행나무를 심을 것인가? 아니면 살구나무를 심을 것인가 하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공자의 고향 중국 산동성 곡부 문묘에는 살구나무가 있다. 조선에서는 은행나무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데 은행나무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어, 가을철 꼬랑내가 문제였다. 지금도 가로수로 애용하는 은행나무는 이 꼬랑내 문제가 심.. 2018. 2.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