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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강수(强首)

by taeshik.kim 2018.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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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중기 때 명문장가. 중원경 사량 사람으로, 나머 석체 아들이다. 선조는 임나가야다. 머리가 툭 튀어나와 소대가리 같다 해서 저리 이름 지었다. 태종무열왕 때 당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해독하고, 문무왕 때는 당나라 옥에 갇힌 문무왕 동생 김인문 석방을 청원하는 표문을 지었다. 사찬으로 승진해 해마다 조 200섬을 받았다. 

삼국사기 권 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3년(673) 봄 정월에...강수(强首)를 사찬으로 삼고 해마다 조[租] 200섬을 주었다.

삼국유사 권제2 기이(紀異)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신라 왕은 문준이 말을 잘해서 황제도 그를 용서해 줄 뜻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강수(强首) 선생에게 명하여 인문의 석방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어 사인(舍人) 원우(遠禹)를 시켜 당나라에 아뢰게 했더니 황제는 표문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용서하고 위로해 돌려보냈다. 인문이 옥중에 있을 때 신라 사람은 그를 위하여 절을 지어 인용사(仁容寺)라 하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열었는데 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기 때문에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 지금까지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강수 열전 : 강수(强首)은 중원경 사량인(沙梁人)이다. 아버지는 나마 석체(昔諦)이다. 그 어머니가 꿈에 뿔 달린 사람을 보고 임신해 낳았더니 머리 뒤편에 뼈가 불쑥 나와 있었다. 석체가 아이를 데리고 당시 어질다는 사람을 찾아가 묻기를 “이 아이 머리뼈가 이런데 어떻습니까”라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듣건대 복희(伏羲)는 호랑이 모습이고, 여와(女)는 몸뚱아리가 뱀이며, 신농(神農)은 머리가 소와 같고, 고요(皐陶)는 입은 말과 같았으니 성현은 다 같은 유(類)로서 그 골상도 보통 사람과 같지 않은 데가 있었습니다. 한데 아이 머리에 검은 사마귀가 난 모습을 보니 골상법에 얼굴의 검은 사마귀는 좋지 않으나 머리에 난 사마귀는 나쁠 것이 없으니 이는 모름지기 기이하다고 해야 것입니다".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르기를 “이 아들은 보통 아이가 아니니 잘 길러 앞으로 나라의 재목으로 만듭시다”고 했다. 나이가 들자 저절로 책을 읽을 줄 알아 의리에 통달했다. 아버지가 그의 뜻을 알아보고자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유교를 배우겠느냐”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가 들으니 불교는 세속을 도외시한 가르침이니, 저는 인간 세계의 사람으로 어찌 부처가 하는 것을 배우겠습니까. 유교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네가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마침내 스승을 찾아 효경.·곡례(曲禮).·이아(爾雅).·문선(文選)을 읽었는데 들은 바는 비록 낮고 비근하다 해도 얻는 바는 높고 깊어 우뚝 솟은 당시의 인걸이 되었다. 강수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野合)했는데 서로 사이가 자못 좋았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중매로 고을의 용모와 덕행이 있는 여자와 결혼시키려 하니 강수가 사양하며 다시 장가들 수는 없다고 하였다. 아버지가 성내며 말하기를 “너는 이름난 사람이라 나라 사람이 모르는 이가 없는데 미천한 사람을 짝으로 삼는다는 것 또한 수치가 아닌가”라고 하니, 강수가 두 번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난하고 천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 실행하지 않음이 실로 부끄러운 바입니다. 일찍이 옛 사람 말을 듣건대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뜰 아래에 내려오지 않게 하며, 가난하고 천할 때에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했으니 천한 아내를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태종대왕이 즉위하자 당(唐)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하니, 그 글에서 이해되지 않는 데가 있어 왕이 그를 불러 물으니, 왕 앞에서 한번 보고는 해석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서로 늦게 만나게 됐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름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으로 이름은 우두(牛頭)라고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대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强首) 선생이라 불러야겠다” 라고 하고는, 그에게 당 황제 조서에 감사하는 답서를 쓰게 했다. 글이 잘되고 뜻을 다 폈으므로 왕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이라고만 했다. 강수는 일찍이 살 길을 도모하지 않아 집이 가난했으나 즐거워했다.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해 해마다 신성(新城)의 조(租) 100섬을 주었다. 문무왕이 말했다. “강수는 문장을 잘 지어 능히 중국과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문서로 뜻을 다 전했으므로 우호를 맺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내 선왕이 당에 군사를 청해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라 하나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여길 수 있겠는가?”. (이에) 사찬 관등을 주고 봉록을 매년 200섬으로 올려 주었다. 신문대왕 때에 이르러 죽으니 장사지내는 비용을 관에서 지급했으며, 옷가지와 물품을 더욱 많이 주니 그 아내가 이를 사사로이 쓰지 않고 모두 불사(佛事)에 바쳤다. 그 아내는 식량이 궁핍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대신이 이를 듣고 왕에게 청해 조(租) 100섬을 주게 하니 그 아내가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천한 사람입니다. 입고 먹는 것은 남편을 따랐으므로 나라의 은혜를 받음이 많았는데, 지금 이미 홀로 되었으니 어찌 감히 거듭 후한 하사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끝내 받지 않고 돌아갔다. 신라 고기(古記)에 "장으로는 강수,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풍훈(風訓), 골답(骨沓)이 유명하다"고 했으나, 제문 이하는 행적이 전하지 않아 전기를 세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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