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역사문화 이모저모2466 불교 우습게 봤다 되치기 당한 연암 박지원[1] 연암 자신은 스스로 과거를 단념했다 하고, 또 그리 볼 만한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포기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듯하다. 반남박씨 벌열 가문 자제로 과거 포기는 곧 시련이기도 했으니, 말이 좋아 벌열이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벌열은 실은 잔반이나 다름 없었다. 이런 그도 결국 관직을 선택할 수 없었으니, 문제는 그가 우암 같은 거물 산림이 아닌 이상, 아무리 공무원 특채라 해도 기껏 얻는 관직이란 현감이나 군수에 지나지 않았고, 이조차 과거급제자냐 아니냐는 엄청난 차별이 있어 아랫것들이 말을 안들어 쳐먹기 일쑤였다.빙빙 돌던 그가 음보蔭補, 곧 말이 특채지 실은 빽을 써서 공직에 처음 진출한 때가 1786년, 50세 때였으니, 마침 젊은 시절 호형호제하며 지낸 유언호兪彦鎬(1730~1796)가 과거에.. 2025. 1. 21. 전장에서 적을 직접 처단하는 람세스, 하지만 개사기는 개사기일 뿐 이집트 신왕국 제19왕조 제3대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알려지기로 기원전 1313년에 나서 기원전 1223년에 죽으니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90세 장수를 했다. 왕위에 있는 기간은 기원전 1290년부터 기원전 1223년, 죽을 때까지니 물경 67년에 달한다. 요컨대 람세스는 수명이나 재위기간 모두 고구려 장수왕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재위 기간 히타이트랑 대판 붙었으니 이를 카데시 전투 Battle of Kadesh라 한다. 서로 이겼다고 주장하지만 대체로 지금은 무승부 정도로 보거니와, 이 전쟁이 일어난 때가 기원전 1274년, 그가 마흔한살 때였다. 왕으로서는 한창 왕노릇하는 재미가 붙을 때였다. 아부심벨Abu Simbel 사원 비름빡을 장식하는 한 이 장면은 그의 시대 강력한 이집트를 선전할 때 매.. 2025. 1. 21. 삼국사기 신라 직관지의 미스터리, 내명부 담당 관청이 없다! 삼국사기 신라 직관지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게 없다. 내명부 담당 관청이다. 하지만 있는데 모르는 거랑 진짜로 없는 것은 번갯불과 반딧불 차이다. 있는 데도 혹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2016년 1월 21일) ***삼국사기 직관지 중 유독 신라 부분만큼은 특정한 시기 있은 신라 관청을 빠짐없이(물론 누락한 데도 있을 것이다만) 정리해 놓았다.그 구체하는 기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지는 몰라도, 신라가 적어도 어떤 방삭으로 국가를 운영하려 했는지가 이 관부와 그 직원 구성록을 통해 엿보게 된다.한데 이상하지 않은가?그런 신라 관부 체계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저 내명부다. 저 내명부를 담당하는 관청이 없다! 왕비를 필두로 왕실 여인네들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조직이 있어야 할 게 아닌가?왕비를 필.. 2025. 1. 21. 형님 얼굴에 비친 아버지, 그런 형님이 가버리니 연암 박지원은 시는 잘 짓지 않았다.그는 알려진 대로 산문에서 유감없는 천재성을 드러냈다.그런 그의 시 중에서도 무릎을 치게 만드는 몇 편이 있으니 연암집 제4권 영대정잡영映帶亭雜咏이 수록한 연암燕岩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다[燕岩憶先兄]는 만고의 절창이다. 우리 형님 얼굴 덮은 수염 누굴 닮았나?아버지 생각날 때면 우리 형님 쳐다봤지이제 형님 그리우면 어딜 봐야 할꼬두건 도포 걸치고선 냇물 비친 나를 봐야지我兄顔髮曾誰似 每憶先君看我兄 今日思兄何處見 自將巾袂映溪行 저에 부친 한국고전번역원 주석은 다음과 같다.정조 11년(1787) 연암의 형 박희원朴喜源이 향년 58세로 별세하여 연암협燕巖峽의 집 뒤에 있던 부인 이씨 묘에 합장하였다.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 감동하여 극찬한 바 있다. 《過庭錄 卷1》 .. 2025. 1. 20. 이덕무 행장에서 유념할 대목들 반드시 메모한 청장관 이덕무, 박지원이 정리한 그의 행적 앞서 연암 박지원이 쓴 형암炯菴 행장行狀, 곧 이덕무가 죽고 나서 절친 연암이 쓴 행적을 소개했거니와, 연암집에 수록된 이 행장은 분량이 길어 제대로 읽고 소화할 독자가 몇이나 될까 몹시도 의뭉스럽기도 하거니와 저에서 나름 우리가 착목해야 하는 대목 몇 가지를 추려 강조하고자 한다. 먼저 어린 시절 이덕무와 관련한 일화로한 번은 집안 사람들이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가, 저녁 무렵에야 대청 벽 뒤의 풀더미 사이에서 발견했으니, 대개 벽에 도배지로 바른 고서古書를 보는 데 빠져서 날이 저문 줄도 몰랐던 때문이었다.라는 증언이 있거니와 이는 고서가 어떻게 소멸해 갔는지를 엿보이는 대목이라, 창호지 벽지로 쓴다 해서 고서 혹은 고문서가 사라져갔다... 2025. 1. 19.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참고문헌 200개 언젠가 쓴 말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100매 혹은 150매 안팎인 논문에서 어찌하면 선행 연구성과 참고문헌이 100~200개에 달하는지 참말로 신통방통하다.나 역시 한때 논문이라는 걸 쓰기는 했지만, 이른바 원전류 혹은 그에 버금하는 보고서류를 제외하고서는 참고문헌 10개 달기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한데 이런 덕지덕지한 참고문헌 논문은 실상 국내보다는 외국이 더 심각해서 그래 저쪽은 연구 축적이 그리 두텁고, 또 연구윤리가 우리보다는 훨씬 더 강하니, 표절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리 하는 갑다 싶기는 하다만 도대체 어찌하여 그 짧은 글에 참고문헌이 수백 개에 이른단 말인가? 내가 그 참고문헌이 달린 데를 유심히 살핀 적이 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왜 이딴 문구까지 참고문.. 2025. 1. 19. 이전 1 2 3 4 ··· 41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