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2702 코메디에는 거지만 나오고 역사에는 서자들만 욕먹는 이유 옛날 웃으면 복이와요 시절에는 워낙 소재에 제한이 많고 구봉서 배삼룡 씨가 코메디에서 소재로 삼았다가는 모두 항의하고 얼굴을 붉히는 통에 코메디 소재가 거지하고 바보 밖에는 없다는 불평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딱 그래서, 욕먹는 건 서자들밖에 없다. 서자가 출세하려고 무리를 해서 남도 모함하고 해꿎이 하다가 탄로가 나서 죽었다던가. 우리나라 역사서에 서자가 좋게 기록되는 건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인물평을 우리는 또 그대로 받아 쓴다. 왜 서자는 맘대로 씹을 수 있는가 하면, 우리가 서자 후손이라고 나타나는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항의할 후손이 없으니 당연히 맘대로 씹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고 집안이 영달하고 후손들이 쟁쟁한 집안 조상격인 인물은아무리 깽판을 쳐도 제대.. 2025. 12. 24. 명문이면 명문답게 역사에 책임을 져라 우리나라는 역사연구로 자기 집안에 뭔가 위해가 된다 싶으면떼로 몰려들어 항의를 하고는 하는 모습을 보는데, 위로는 조선시대 최고 집정이라 할 왕족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무슨무슨 대단한 집안이었다는 혈족까지뭐 하나 자기 조상들한테 조금만 손해가 간다 싶으면 발끈해서 항의하고 심지어는 명예훼손 운운 이야기까지 설왕설래하는 걸 가끔씩 보는데, 한 가지 이야기를 이런 분들에게 해주고자 한다. 영국의 리차드 3세-. 잘 알다시피 전쟁에 져서 반대파에 죽임을 당해 묻어버린 것을 요즘 주차장 자리에서 발굴해서 DNA 연구에 의해 리차드 3세라는 것을 밝혀내는 개가를 올렸는데, 이때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에 DNA 연구로 추적하다 보니 지금까지 영국왕실 후손으로 알려진 최고급 귀족들 집안이사실은 영국왕실.. 2025. 12. 23. 족보는 틀린 것이 많아 사료로 쓸 수 없다는 그 황당한 이야기 이런 말이 있다. 족보는 사실이 아닌 것이 많아 사료로 쓸 수 없다는 이야기-. 그런데 그렇게 친다면 일본서기나 고사기는 어떤가한국학계의 입장은 적절히 왜곡된 사료라는 것이 공식입장이면서도 잘만 인용하지 않나. 족보는 필자도 앞에서 밝혔듯이당연히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다. 아예 완전히 날조 족보도 있고, 사실 같이 보이는 것도 뻥이 섞여 있고, 또 남의 족보를 사서 들어간 경우도 있다. 족보 믿으면 안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지만, 우리나라 조선 후기사. 족보로 상징되는 가족과 혈연, 이것을 무시하고 과연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할 수 있을까. 우리 학계가 족보를 제대로 파고 들어가지 않는 것은과연 믿을 수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문중을 건드려 시끄러울까봐인가. 일기는 어떤가. 이것은 다 믿을 수 .. 2025. 12. 23. 대동보가 등장하는 방식, 선세 계보의 합체 대개 체계화한 족보가 출현하기 이전에는아무리 잘난 집안도 자기 집안을 중심으로 직계를 그리고, 그 직계에서 가지를 친 모양의 소박한 계보만 소지하게 된다. 삼국사기 등에 초기 기록에서 왕실계보를 연상하면 된다.따라서 직계 계보도 간신히 그린 모양의 계보가 나오게 되는데예를 들어 태조의 선세 계보를 보면, 목조--익조--도조--환조의 직계계보 위주로 갖게 되니 이건 조선 태조 집안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어떤 잘나가는 집안도 여말선초에 집안 족보를 그려 보라고 하면다들 대동소이했다. 그리고 이 직계 계보가 바로 후일의 대동보 원형이 된다. 이런 직계계보를 벗어나 파보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어느 집안 후손 중에 정말 잘 난 후손들이 자기 집을 중심으로 주변에 수단하여 자기.. 2025. 12. 23. 영남권이 현격히 낮은 전주이씨 분포 우리나라 본관별 분포가 국세조사 통계로 제공된다. 여기 보면 전주이씨 분포가 있는데 이 분포도를 보면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매우 많다. 전주이씨 분포는 서울과 호서일대를 기반으로 전국적으로 분포하지만영남지역 분포가 확연히 주변보다 낮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분포가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렇게 분포가 만들어진 특별한 역사적 연유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운 분포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조선건국 이후 전주이씨의 확산이과전법 체제를 타고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한다. 과전법이라는 것이 조선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비교적 균일한 비율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과전이 집중적으로 형성된 지역이 있는 듯 한데, 이러한 흐름에서 영남이 어느 정도 예외적 상황이었던가 싶은 부분이 있다. 우리는 과전법 체.. 2025. 12. 23. 경화사족은 18세기 이후에 비로소 나타났는가 흔히 경화사족이라 하면 18세기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독점적 권력을 누린 사족들을 지칭하는 바 이를 대충 읽으면 경화사족 이전에는 향촌에 분포하는 사족 쪽에 권력이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정말 그런가. 필자가 보기엔 우리나라 사족들권력과 재물을 독점한 사족들은 서울 경기 일원을 벗어나 존재해 본 적이 없다. 사림의 진출과 소위 산림이라는 이름으로 일이백년 향촌 사족들이 득세한 "일시적"상황이 있었을 뿐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 도시의 사족을 향촌의 사족이 압도하거나 어깨를 나란히 한 적이 전혀 없다. 고려시대만 해도 권력을 누리던 사족들은 전부 개성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분포해 살았고, 조선이 건국하자 이번에는 한양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옮겨와서울 안에 살면서 선산과 농지는 경기 일원에 가지고 있는 방식.. 2025. 12. 23. 이전 1 2 3 4 ··· 45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