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55~475년이다. 이름이 경사慶司 혹은 경餘이며, 근개루近蓋婁)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으로 나타난다.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며 부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와 충돌해 그 정벌을 위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고구려 반격을 불러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혀 아차산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조 : 개로왕蓋鹵王<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大柵]을 설치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8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제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首丘之心]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王略]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경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있다.』[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월越 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 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친지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가 있었지만 나라[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 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 [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했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눠 양쪽에서 공격하는 한편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 혹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했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했다. 이때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며 말했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난 것이 늦었음을 한탄했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상(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습니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다”고 말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榭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덧널[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 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 대로對盧인 제우齊于·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尒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했다. 논한다.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鄖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 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1대 개로왕盖鹵王은 근개로왕近盖鹵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경사慶司다. 을미년에 즉위해 20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48 (열전 제8) 도미 : 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호적에 편입[編戶]된 하찮은 백성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뻤으며 또한 절조있는 행실을 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더불어 말하기를 “대저 부인의 덕은 비록 지조를 지킴을 앞세우지만 만약 그윽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하니, 대답하였다.“무릇 사람의 정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왕이 이를 시험하여 보기 위하여 도미에게 일을 시켜 잡아두고는 한 명의 가까운 신하로 하여금 거짓으로 왕의 의복을 입고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하였다. 사람을 시켜 왕이 오셨다고 먼저 알렸다.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나는 오래 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미와 내기를 걸어서 이겼다. 내일 너를 들여 궁인(宮人)으로 삼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네 몸은 내것이다.”드디어 난행을 하려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국왕께서는 헛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으리요!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오겠습니다.”물러나 계집 종을 번거롭게 치장시켜 바쳤다. 왕이 후에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도미를 왕을 속인 죄로 처벌하여 두 눈알을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 나서 그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음행을 하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였다.“지금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을 모시는 일이라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청컨대 다음 날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이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갔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니 문득 외로운 배가 물결을 따라 이르렀으므로 이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다달아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었다. 풀뿌리를 캐 씹어 먹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䔉山 아래에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다. 옷과 음식을 구걸하며 구차히 살아 나그네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문주왕 즉위년 : 문주왕文周王<문주汶洲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毘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은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개로盖鹵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즉위했다. 도읍을 웅주熊川로 옮겼다. 2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동성왕 23년(501) :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제南齊 건원建元 2년(480)에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詔書를 내려 말했다.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와 은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변경의 번국蕃國이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분을 지켰으니 곧 사지절使持節 도독都督 백제제군사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을 수여하노라.」 또 영명永明 8년(490)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렸다. [남제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보내 모대를 책명冊命하여 돌아가신 조부 모도의 작호를 잇도록 하고 백제왕으로 삼아 말하였다.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받아 정성이 먼 지역에서도 드러났고, 바다 길이 조용하게 되어 조공을 바침에 변함이 없었다. 떳떳한 법전[彛典]에 따라 천명을 이어가도록 하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往敬]. 아름다운 위업을 받는 것이니 가히 삼가지 않으랴.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을 삼는다.」』 그러나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었다. 또 살펴보니 모대는 개로왕蓋鹵王 손자요, 개로왕 둘째 아들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그 할아버지를 모도라고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실린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41년 :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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