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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거칠부(居柒夫)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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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502?~578?). 신라인. 황종(荒宗)이라고도 표기한다. 진흥왕~진지왕 재위 무렵에 군사와 내정에 모두 막대한 역할을 수행한 중신(重臣)이었다. 김씨(金氏)로서 나물왕 5대손이고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고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다. 젊었을 때는 승려로 고구려에 들어가 활동하며 나중에 신라로 넘어오게 되는 법사(法師) 혜량(惠亮)을 만나게 사귀게 된다. 진흥왕 6년(545)에는 대아찬으로서 왕명에 의해 국사를 편찬했고, 같은 왕 12년(551)에는 7장군을 이끌고 죽령을 넘어 고구려를 침공, 10개군을 탈취했다. 진지왕 원년(576)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됐다. 진흥왕 순수비를 비롯한 신라 당대 금석문에 의하면  ==라고 등장하고 있어 지속적으로 관위가 상승했음을 알 수 있다. 78세에 죽었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인데, 진평왕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가 상대등에 임명되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 사망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지증왕 3년(502)에 출생한 셈이 된다. 마운령비문에는 거칠부지(居朼夫智)라는 표기로 등장한다.


화랑세기 문노공 전 : 사도가 먼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통하게 하고, 다른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약속하고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며 신왕을 통제하고, 말보(末?)의 남편인 황종공(荒宗公)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중망(衆望)을 눌렀다. 그 때 황종공의 딸인 윤궁(允宮)이 미실의 심복이 되었고, 윤궁의 누이인 윤옥(允玉)은 미생의 첩이었고, 윤궁의 남동생인 윤황(允荒)은 사도의 딸인 월륜(月輪) 공주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황종공을 추대한 것이다. 거칠부공(居柒夫公)은 나이가 많아 대등인 노리부(弩里夫), 노동공(弩同公) 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므로 미실은 권세를 잃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6년(545) 가을 7월에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아뢰었다.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을 기록함으로써 포폄(褒貶)을 만대(萬代)에 보이는 것이니, 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대에 무엇을 보이겠습니까”.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선비들을 널리 모아 편찬케 했다. 12년(551) 봄 정월에...왕이 거칠부 등에게 고구려를 침입케 하니, 이긴 기세를 타고 10개 군을 빼앗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지왕 :  원년(576)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랏일을 맡겼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이라고도 한다>는 성이 김씨(金氏)이며 나물왕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각간(角干) 잉숙(仍宿)이고 아버지는 이찬 물력(勿力)이다. 거칠부는 젊었을 때 사소한 일에 거리끼지 않았으며 원대한 뜻을 품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문득 고구려를 정찰하려 그 땅에 들어갔다가, (마침) 법사(法師) 혜량(惠亮)이 절을 열어 불경을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그 곳에 가서 강경(講經)을 들었다. 어느 날 혜량이 묻기를 “사미(沙彌)는 어디서 왔는가?”라고 하니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날 저녁 법사가 그를 불러 만나니 손을 잡으며 몰래 말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보았으나 자네 용모를 보니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네. 아마 다른 마음이 있겠지”. 이에 대답하기를 “저는 변방에서 태어나 아직껏 불도의 원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법사님 덕망과 명성을 듣고 가르침을 받고자 왔으니, 법사님께서는 거절하지 마시고 끝까지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소서”라고 말했다. 법사가 말했다. “노승은 불민하지만 능히 그대를 알아볼 수 있는데, 이 나라는 비록 작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자가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대가 잡힐까 은밀히 충고해 주는 것이니 빨리 돌아감이 좋을 듯하네”. 거칠부가 돌아가려 하자 법사가 또 말하기를 “그대 상을 보니 제비 턱에 매눈이라, 장래 반드시 장수가 될 것이네. 만일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나를 해치지 말라”고 했다. 거칠부가 말하기를 “만일 법사님 말씀과 같이 법사님과 즐거움을 같이하지 않는다면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환국해 관직에 나아가 관위가 대아찬에 이르렀다. 진흥대왕 6년 을축(545)에는 왕명을 받아 여러 문사(文士)들을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고는 파진찬으로 승진했다. 12년 신미(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8장군에게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케 했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 10군을 취했다. 이때 혜량법사가 자기 무리를 이끌고 길거리로 나오니 거칠부가 말에서 내려 군례로 인사를 올리고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전일 유학할 때 법사님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전했는데 지금 뜻밖에 서로 만나니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니 법사가 대답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정치가 어지러워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네. 바라건대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 주게”. 이에 거칠부가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와서 왕을 뵙게 하니, 왕이 법사를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이때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와 팔관(八關)의 법이 시작되었다. 진지왕 원년 병신(576)에 거칠부는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맡았다가 늙어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8년(547)에는 대아찬 칠부(柒夫) 등에게 명해 문사(文士)를 널리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케 했다.


황종(荒宗) ☞거칠부지(居朼夫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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