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신라인.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화랑 집단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배출했다. 아버지 오기는 27세 풍월주이며, 할아버지 예원은 20세, 증조부 보리는 12세, 고조부 이화랑은 4세, 5대조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였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김대문 열전 :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2대 남해왕(南解王) :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 한다”면서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를 김대문(金大問)이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잇거라'라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제3(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15년(528)에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으로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했다. 그 때 양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다 쓸 지를 모르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했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니,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케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가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며 셋째가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녀가 병이 심했으므로 왕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했더니, 왕녀가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으니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으니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이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믿고 받드는 자가 가끔 생겼다. 이 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뭇 신하가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므로 왕이 어쩔줄 몰라 했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의 논의를 진정케 하십시오”. 왕이 말했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데 죄없는 사람을 죽임은 잘못이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했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해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뭇 사람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 말했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해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치니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지만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논(論)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음을 염려해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 하고는 그 행동을 지켜본 다음에 뽑아 쓰고자 해서 마침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였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고,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됨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해 조정에 천거했다. 대문(大問)이 말하기를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