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김문희 사이에 난 셋째아들로, 문무왕 김법민과 태대각간 김인문 동생이다. 진덕여왕 2년(648) 아버지를 따라 당에 들어가 그곳에서 숙위하다가 이후 어느 시점에 귀국해 부왕 즉위와 더불어 이찬에 임명됐다. 무열왕 5년(658)에는 중시가 되었으며, 백제 멸망 뒤인 동왕 8년(661), 백제부흥운동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잡찬으로서 출전해 공을 세웠다. 문무왕 5년(665) 봄 2월에 이찬으로 죽으니 왕자의 예(禮)로 장사지냈으며, 당 황제는 조문사신을 보냈다. 판본에 따라 '文汪(문왕)'이라 쓰기도 하는데 이 쪽이 타당할 듯하다.
舊唐書卷三 本紀第三 太宗下 : 22년(648)…閏月…癸未에 新羅王이 그의 재상인 이찬천(伊贊千)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내조(來朝)케 했다.(二十二年…閏月…癸未, 新羅王遣其相伊贊千金春秋及其子文王來朝.)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2년(648)…겨울에 한질허(邯帙許)로 하여금 당에 조공케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御史)를 시켜 물었다.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한]질허가 대답하였다. 일찍이 천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기년(紀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 조정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태종이 그렇겠다고 여겼다.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읍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춘추가 아뢰었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에게 [머물러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어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君解)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舊唐書 권 제199上 列傳 제149上 東夷 新羅國 : [貞觀] 22년(648. 新羅 眞德女王 2)에 眞德이 그의 아우 國相 伊贊干 金春秋[註026] 및 그의 아들 文王을 보내와 朝覲했다. 조서를 내려 春秋에게는 特進을 除授하고, 文王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除授했다. 春秋가 國學에 나아가 釋奠 및 講論하는 의식을 구경하겠다고 청하므로, 太宗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溫湯』ㆍ『晋祠碑』 및 新撰한『晋書』를 내렸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3品이상의 관원을 시켜 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2년(655) 봄 정월에…고구려가 백제ㆍ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우리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여 33성을 탈취하였으므로,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3월에 당나라가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여러 아들 중에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를 해찬(海)으로, 인태(仁泰)를 각찬으로,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3년(656)…가을 7월에 아들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문왕을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 5년(658) 봄 정월에 중시 문충(文忠)의 [벼슬을] 바꾸어 이찬으로 삼고, 문왕을 중시로 삼았다. 8년(661) 봄 2월에 백제의 남은 적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이찬 품일을 대당 장군(大幢將軍)으로 삼고 잡찬 문왕, 대아찬 양도(良圖), 아찬 충상 등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으며, 잡찬 문충을 상주 장군(上州將軍)으로 삼고 아찬 진왕(眞王)으로 그를 보좌케 하였다. 아찬 의복(義服)을 하주 장군(下州將軍)으로, 무훌(武)과 욱천(旭川)을 남천 대감(南川大監)으로, 문품(文品)을 서당 장군(誓幢將軍)으로, 의광(義光)을 낭당 장군(郎幢將軍)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3월 5일에 도중에 이르러 품일이 휘하의 군사를 나누어 먼저 가서 두량윤성(豆良尹城) 남쪽에서 군영 만들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백제인이 진영이 정돈되지 않았음을 바라보고 갑자기 나와 생각지도 않게 치니 우리 군사는 놀라서 흩어져 달아났다. 12일에 대군이 고사비성(古沙比城) 밖에 와서 주둔하면서 두량윤성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그러나 한 달 엿새가 되도록 이기지 못하고 여름 4월 19일에 군사를 돌이켰다. 대당(大幢)과 서당(誓幢)이 먼저 가고 하주(下州)의 군사는 맨 뒤에 가게 되었는데,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군을 만나 싸워 패하여 물러났다. 죽은 사람은 비록 적었으나 병기와 짐수레를 잃어버린 것이 매우 많았다. 상주(上州)와 낭당(郎幢)은 각산(角山)에서 적을 만났으나 진격하여 이기고 드디어 백제의 진지에 들어가 2천 명을 목베었다. 왕은 군대가 패하였음을 듣고 크게 놀라 장군 금순(金純), 진흠(眞欽), 천존, 죽지를 보내 군사를 증원하여 구원케 하였으나,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러 군대가 물러나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돌아왔다. 왕이 여러 장수들이 싸움에서 패하였으므로 벌을 논하였는데, 각기 차등있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 5년(665) 봄 2월에…이찬 문왕(文王)이 죽으니 왕자의 예(禮)로 장사지냈다. 당나라 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문하고 아울러 자줏빛 옷 한 벌과 허리띠 하나, 채색비단 100필, 생초(生) 200필을 보내왔다. 왕이 당나라 사신에게 금과 비단을 더욱 후하게 주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태종춘추공 : 태자 법민(法敏)·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니 전날에 꿈을 샀던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령공(車得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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