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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도전과 응전, 孝를 창출한 불교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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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소한 도덕 윤리 관념으로 무장한 불교가 바다를 건너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서, 혹은 동지나해를 지나 동아시아로 침투해 서서히 저변을 넓혀가자, 그것이 못마땅하기 짝이 없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그 타도의 기치를 높이 쳐들었으니, 그 플랑카드엔 언제나 "저 외부 귀신들은 애미 애비도 모르는 상놈"이라는 문구가 선두를 차지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출세간出世間을 지향하는 불교는 필연적으로 혈연의 단절을 전제할 수밖에 없으니, 그리하여 부모도 버리고 형제자매도 팽개치며, 석가모니 자체가 그랬듯이 피붙이 자식조차 팽개치고는 더 큰 구제를 내걸었으니, 그들에게 혈연은 무엇보다 단절해야 할 괴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는 필연적으로 노우 섹스로 흘렀으니, 자식도 생산하지 아니하고 대중을 자식으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이는 사바세계 통치권력자들에게도 눈엣가시와도 같았다. 이들은 소득이 없었으므로(적어도 그리 선언했고, 초창기 승가에서는 분명 구걸을 통해 연명하고자 했으므로 분명히 그랬다) 물릴 세금이 없었다. 출세出世를 했다 하므로, 사바세계 권력과 국가가 그들을 노동 현장에 동원할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의 수행처인 사찰은 탈세脫稅, 둔세遁世의 온상이라는 비난이 잇따랐다.


집안에서는 孝를 버렸고, 밖에서는 忠을 버린 존재, 그들이 불교의 승려들이었다. 


2003. 8. 12 충남 계룡산 갑사에서 열린 백중행사.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천도제를 행한다. 음력 7월 15일은 불교의 우란분절과 농사일을 잠깐 쉬는 민간의 백중이 겹쳐진 날로 예부터 돌아가신 조상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를 거행한다.(연합DB)



이런 도전과 공격에 줄기차게 시달린 불교는 처음엔 아니라고 발악했지만, 결국 그 압력에 굴하고 말았다. 《우란분경》이며 《부모은중경》이니 하는 새로운 불교 경전을 석가모니 부처님 말씀이라 해서 조작해 내고는 그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향해 "봐라, 우리 불교도 얼마나 효와 충을 강조하는지"라고 자신있게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목련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우란분경》과 그 자매편 《부모은중경》은 적어도 언설만으로는 忠과 孝라는 윤리가 강고하기만 한 동아시아 사회에서 불교가 뿌리내리고 튼신하게 자리잡기 위한 몸부림의 처절한 흔적이다. 이 두 경전을 조작함으로써 비로소 불교는 어느 정도 불교는 뿌리째 박멸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사리는 개뼉다귀나 진배없으니 태워버려야 한다는 저 한유의 공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을 비롯해 임진왜란이라는 누란의 위기에서 왜 이 땅의 승려들이 창과 칼을 잡고 도탄에 빠진 백성과 임금을 구하겠다고 일어섰겠는가?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무엇에 대한 도전이었고 무엇을 위한 응전이었는가? 저 까까중들은 부모도 모르듯이 임금도 모른다는 그 항변에 대한 응전이 이른바 승병僧兵 의거였다.


김해 선지사 소장 불설부모은중경. 조선시대 통털어 이 은중경은 가장 빈번한 출판을 기록했다. 불교는 애미애비로 모르는 잡놈들이라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일환이었다.(연합DB)


더불어 살아남고자 세금도 내기 시작했고, 원래 승려는 부모는 물론이고 임금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지만, 마침내 그에 굴복해 임금 앞에서는 臣이라 자칭하기도 했고, 남한산성을 쌓고 그것을 보수하는 일을 자발로 떠맡아 오분대기조 역할도 했다.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불교을 제창했을 적에, 그에는 孝와 忠이 깃들만한 구석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효와 충은 사카무니가 말한 그 깨침과는 전연 반대의 도덕윤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반열반에 이르기는 과정에서 반드시 퇴출해야 하는 괴물 중 상괴물이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공격이 하도 거세지니, 스스로 살아남고자 효를 조작하고 충을 급조하기에 이른다. 우리 불교도 역시 충과 효에 충실하다는 그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며, 그 도덕을 체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 눈물겨운 투쟁이 산스크리트어 혹은 팔리어 초기 불경 번역사에서도 고스란하다. 내가 알기로 인도 불경, 특히 아함 계통 경전에는 孝에 해당하는 말이 없다. 하기야 있을 리 있겠는가? 하지만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원문에도 없는 孝라는 말이 조작되어 들어가기 시작한다.


불교도의 이 조작 공작은 나중에 어느 정도 방어막을 형성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해 준다. 남북조시대 말기, 특히 도교를 중심으로 또 한 번 불교 타도의 깃발이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을 때,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불경에 석가모니가 孝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권장했다는 증거들로써 바로 조작한 불교 경전 번역본들을 들이밀곤 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이 땅에 상륙한 순간, 어쩌면 가장 비불교적인 孝를 장착한 새로운 동아시아 불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불교는 공격에 시달렸다. 작금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신교가 욕먹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큰 부패의 온상으로 몰려 거센 공격에 시달린 것이다. 이런 공격은 조선왕조 개창이 더욱 부채질을 해 댔으니, 그 과정에서 나온 불교 공격이 삼봉 정도전의 《불씨잡변》이다. 덧붙이건대 이 잡변은 수준이 형편없기 짝이 없어, 기존 중국 땅에서 나온 불교 공격론의 짜깁기요 우라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를 침소봉대하여, 그것이 새 시대를 연 좌표인양 삼는다. 누가? 이 땅의 역사학도들이 말이다. 


*** 이상은 작년 오늘, 그러니깐 2017년 10월 9일 내 페이스북에 '도전과 응전, 孝를 조작하는 불교'라는 제목으로 긁적인 글을 조금 손을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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