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계절의 노래(286)
초봄 절구 세 수[初春三絶] 중 셋째
[宋] 여도(呂陶, 1028~1104) / 청청재 김영문 選譯評
궁벽한 산 어둔 계곡
몇 겹으로 깊숙한데
한 나무에 동풍 불어
쌓인 음기 흩어지네
이로부터 얇은 얼음
더 신중히 밟을지니
세상 길 평소에도
이미 두려워 떨었다네
窮山幽谷幾重深, 一樹東風散積陰. 從此薄氷尤愼履, 世途平日已寒心.
며칠 간 이번에 출간한 《원본 초한지》를 다시 집중해서 읽느라고 한시 연재를 쉬었다. 독자 여러분께 송구한 마음이다. 다시 계절의 노래를 독자 여러분께 들려드린다.
겨울은 초목이 쇠락하고, 산천이 얼어붙고, 동물이 칩거하는 계절이므로 흔히 어둠, 냉기, 죽음, 침잠, 곤궁 등을 표상한다. 그런 겨울 뒤를 잇는 계절 새봄은 겨울과 반대 되는 이미지를 뽐낸다. 이 때문에 봄이 광명, 온기, 부활, 도약, 여유 등의 의미를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는 은유이기도 하고 환유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알레고리이기도 하다. 모티브가 일상적이고 관습적이어서 시적 긴장을 잃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새봄의 다양한 의미망은 우리에게 늘 희망과 기쁨을 선사한다.
이 시도 그렇다. 비유는 다소 상투적이지만 시어와 그 구조가 환기하는 자장은 매우 광대하면서도 환상적이다. 산겹겹 물겹겹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겨울 계곡은 어쩌면 광명이 사라진 지옥처럼, 어쩌면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처럼 우리의 시야를 캄캄하게 가로막는다. 그런데 계곡 입구 한 그루 나무에 밝고 따뜻한 동풍이 불어온다. 그러자 마치 영화의 페이드인 장면처럼 동풍은 환한 빛과 따뜻한 온기로 겹겹이 쌓인 캄캄한 어둠을 몰아낸다. 이는 흑암의 깊음을 하느님의 빛으로 일소하는 천지창조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런 동풍의 힘이 바로 봄에서 기원한다. 새해의 새봄은 바로 조화옹(造化翁)에 다름 아니다.
어둠이 물러가는 계곡에는 봄바람에 녹아내리는 마지막 얼음이 수면을 덮고 있다. 《시경·소아》 「소민(小旻)」에서 “전전긍긍 조심하며, 깊은 연못에 임한 듯하고, 얇은 얼음을 밟는 듯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고 묘사한 바로 그 얇은 빙판이다. 어릴 적 시골에서는 이런 얼음을 ‘고무 얼음’이라고 불렀다. 자칫 잘못 디디면 바로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새봄은 늘 꽃샘추위를 동반한다. 새시대는 늘 구시대의 남은 꼬리에 휘둘린다. 늘 그런 것처럼 환희의 봄날은 기대한 것처럼 쉽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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