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9) 하늘을 쳐다본 산서성 고건축 기행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9. 30.
반응형

가운데가 김홍식 교수이고 맨오른쪽이 김왕직 선생이다.

 

얼마 전 이상명이라는 사람이 명지대 대학원 건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말인즉슨 조선 왕릉을 구성하는 건축물 중에서도 정자각에 초점을 맞춘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했다.

그에 나 역시 관심이 지대한 까닭에 김군을 통해 문제의 논문 송부를 저자에게 부탁했다. 저자와 직접 인연이 없다 해서 그와 친한 듯이 보이는 김군에게 다리를 놓아 달라는 뜻으로 그리한 것이다. 

며칠 뒤 저자 직접 사인이 붙은 학위 논문이 남영동 집으로 날아들었다. 그 증정 인사말에서 李君은 2004년 산서성 답사를 같이한 인연이 있다는 기억을 상기했다. 이군한테는 좀 미안했다. 그는 나를 기억하는데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했으니 실례도 이만저만이 아닌 셈이다. 

다시 그 며칠 뒤, 도서출판 메디치미디어 김현종 사장과 연희동 중국집에서 저녁을 같이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페이스북 기반 학술단체인 ‘문헌과문물(문문)’을 함께 운영하면서 깊은 인연을 쌓아가는 순천향대 중문학과 홍승직 교수와 셋이 모였다. 나중엔 인근 서대문자연사박물관 이정모 관장이 합류했다. 

그 자리엔 어찌하다가 다른 참석자도 있었으니 개중 한 명이 선문대 역사학과 건축 담당 안대환 교수였다. 안 교수와 인사를 하면서 어딘지 눈에 익다 했는데, 그가 명함을 건네면서 하는 말이 “기자님과는 산서성 답사를 같이한 인연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랬구나, 安君  역시 산서성 동창이었다.

고건축 전공자가 역사학과 교수로 있다는 점이 잠시 이채롭다 생각 했는데, 무슨 곡절이 있어 이리 된 모양이다. 한데 듣자니 안군은 다음 학기에 충북대로 직장을 옮긴다 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라 2004년 산서성에서 맺은 인연은 얼키설키 내 삶을 지배하는 인망人網의 하나로 강력하게 작동한다. 이 답사에 얽힌 추억이나 그 경험이 나에게 미친 영향은 더러 이곳저곳에서 언급했다. 그 까닭은 그만큼 이 답사가 나한테는 소중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해 8월 12일 인천공항을 떠나면서 시작한 산서성 고건축 답사는 같은 달 18일까지 4박5일 일정으로 진행됐다. 명지대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가 ㈜금성건축과 함께 기획한 이 답사에는 지금 기록을 들춰보니 23명이 참가했다. 두 기관 모두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가 ‘장악’한 곳이었다. 나는 한건연 초청 형식을 빌려 참가했다. 

당시 참가자 명단을 지금에 보면 가슴 아린 대목이 있다. 이후 김 교수가 창립한 매장문화재 발굴단 한울문화재연구원에서 일하던 장진희가 몇 년 전 느닷없이 타계했기 때문이다. 그 선한 웃음을 잊을 수가 없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김 교수와 직접 인연이 없었다. 다만, 그가 한국 고건축계에서는 마피아 조직을 방불하는 명지대 사단의 두목이라는 막연한 소문만 듣던 터였다. 민감한 반응 보이지 마라. 마피아니 명지대 사단이니 하는 말은 김 교수 본인도 정년 퇴임하는 자리에서 정식으로 쓴 말이다. 

그런 김 교수가 나를 초청한 이유나 사정을 아직도 나는 모른다. 내심으로는 누군가가 기자 한 명 데려가자 했던 듯 하고, 그가 바로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역임한 조유전 선생이 아닌가 하나, 정확한 곡절은 모르겠다. 

이 산서성 답사는 이후 곧바로 《중국 산서성 고건축 기행》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집필은 김홍식 조유전 두 분이 했다. 출판사는 김영사에서 편집장을 하다가 독립한 고세규 씨가 차린 고즈윈이다. 

고세규 씨는 이후 한동안 이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2016년 2월 현재는 김영사로 복귀해 편집 담당 이사인지로 일하면서 이 출판사 편집 업무를 총괄하는 위치에 있다. 출판사 섭외는 내가 했다.

고 이사는 이전 김영사 시절 내 두 저서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2000)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2001)를 출간한 인연을 쌓은 이래 줄곧 돈독한 관계에 있다. 

당시 답사지를 대략 추려 보면 태원으로 들어가 오대산으로 향해 그 주변 남선사와 광제사, 불광사를 돌고는 오대산 중심 건축군으로 들어가 현통사 원조사 탑원사 용천사 백산사를 둘러봤다. 이어 오대산 중 북대를 넘어 북쪽 대동 쪽으로 달려 현공사와 응현 목탑, 정토사를 보고는 운강석굴을 난생 처음 내 눈으로 보는 감격을 맛보았다.

다시 일행은 대동 시내로 나와 화화엄사와 상화엄사, 그리고 선화사를 견학하고는 버스로 북경으로 향해 천안문 광장을 구경하고는 귀국길에 올랐다. 

 

김홍식 교수

 

이 여행은 한건연 초청 형식을 빌렸기에 나로서는 공무 출장이었다. 이는 곧 그 결과물을 기사화해야 강박과 동의어다. 이를 나는 귀국한 직후 ‘산서성 고건축 기행’이라는 시리즈로 5회 안팎으로 송고했다고 기억한다. 

이 답사가 준 교훈이랄까 경험으로 나는 매양 하늘을 쳐다보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때까지 나는 문화재 담당 기자 생활 만 6년을 채우고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고고학 중심이었지 고건축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고건축은 고고학, 그리고 미술사와 더불어 문화재 영역을 이루는 근간 중 하나다. 그렇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고건축 관련 현안은 고고학이나 미술사에 견주어서는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어서인지 나 역시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다. 

이 답사에서 나는 매양 참가자들의 행태가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우선 고고학이나 미술사학도들에게 성지와도 같은 박물관은 거의 관심이 없다. 철저한 현장 중심이라 박물관은 지나치지 일쑤다. 나아가 그 어떤 문화재 현장을 가더라도 이들은 내부 구성물에는 전연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하늘과 껍데기에만 정신이 팔린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 중 하나인 오대산 기슭 남선사과 불광사 대웅전만 해도 이들은 그것이 봉안하는 내부 불상과 같은 조각은 거들떠도 안 본다. 대신 이들은 건축물이 보이자마자, 혹은 그 경내로 들어서자마자 눈알을 부라리며 우선 지붕과 처마만 쳐다보면서 걸신 걸린 듯 연신 셔터를 눌러댄다. 건축물 내부로 들어서서도 천장이니 벽체, 그리고 기둥만 쳐다보느라 여념이 없다. 

이에 첨부하는 저들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 이 무대가 아마도 내 기억에는 대동 상화엄사 아닌가 하는데, 두목 김 교수가 김왕직 박사를 비롯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해당 건축물을 설명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어니와, 모두가 하늘을 쳐다본다. 이 행태가 하도 이상해서 나는 매양 나보다 젊은 친구들한테는 “너희는 어째 매양 하늘만 쳐다보누?” 하는 핀잔을 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여행을 통해 나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섰다. 속내뿐만 아니라 그것을 감싼 외투 역시 중요하다는 그런 배움을 얻은 것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고고학도, 혹은 미술사학도 흉내를 내고 있었다. 불상이니 하는 속내에만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그에 격발해 나는 귀국 직전 북경에서 신화서점에 들린 김에 고건축과 관련한 책을 닥치는 대로 집었다. 그렇게 사서 가져온 책들을 얼마나 보았느냐 하면, 실은 거의 거들떠 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고건축에 대한 관심 혹은 절실이 증대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이후 기회 닿는 대로 이 분야 공부에도 나름대로는 천착했다고 본다.

참, 김왕직 박사 얘기 잠깐 덧붙여야겠다. 당시 김 박사는 나와 같은 방을 썼다. 내 코고는 소리에 고생 좀 했을 성 싶다. 말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답사에서 나는 김 교수께 저만치 부려먹었으면 이젠 교수 시켜주셔야죠 라고 두어 번 말했다. 물론 농이었다. 한데 귀국하고 얼마 뒤 김 박사는 모교 건축학과 교수가 되었다. 다 내 공로라고 믿고 싶다. 믿거나 말거나..(2016년 2월 19일 ) 

 
[문화재 기자 17년] 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할 때 였으니 개중 한 꼭지였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