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이 고고학 현장에서 무수하게 남긴 일화야 두 말 해서 무엇하랴만, 개중 최몽룡표 전매특허가 장광설이라
이 양반은 국적 불문, 전공 불문 가리지 아니하고선 각종 회의 석상 같은 데서 일대 장광설을 펼치기로 유명한데,
문제는 이게 국경을 넘어서도 그랬다는 데 심각성이 있었다.
국내야 그런갑다 하고 말지만(난 이골이 나서 저 양반 마이크 잡는 순간 딴데로 틘다.) 국경을 탈출해서도 이런 모습이 펼쳐지는데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대략 20년 전쯤, 선생을 모시고 남경 일대를 간 적 있다.
내가 자주 소개한 남경 손오대묘孫吳大墓가 발굴된 직후였으니, 그 현장도 돌아보고 했다.
당시 어떤 인연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통역 겸해서 중국통 미술사학도(본래는 고고학도다) 양은경 부산대 교수가 동행했으니,
북경대 고고학과 출신인 이 친구 참말로 내가 대단하게 생각하는 게 그 고된 통역을 마다 하지 않았으니 그 점은 지금도 내가 늘 고맙게 생각한다.
한국 육조시대 고고학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 왕지고王志高라는 친구가 있다.
나랑 아마 나이가 비슷할 텐데,
이 친구 역시 북경대 고고학과 출신으로 당시 남경시박물관에 근무 중이었고,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모름지기 이 친구를 통하는 일이 많았다.
지금은 남경 어느 대학으로 호적 파고 갔을 것이다.
그날도 이 친구가 대접한다 해서 그날 저녁을 잡았는데, 그만 일이 터지고 말았다.
저녁 식사전 낌새가 영 이상하긴 했는데, 몽룡 선생이 무엇인가 계속 메모를 하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인사를 나누는데, 왕지고가 최몽룡 선생을 잘 안다 했다.
하도 어린시절부터 대가로 군림한 한국고고학도니 그네가 모를 리 만무했고, 그래서 이날 처음 본 몽룡 선생을 "존함은 익히 들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왕지고가 극진히 대접했다.
이런저런 인사를 나누고 식사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에헴 하며 몽룡 선생이 그 작은 특유한 메모 수첩을 꺼내들더니 양 교수를 향해 하나도 빠짐없이 통역하라 하면서 일대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나 분명한 것은 당연히 고고학 관련 내용이었으며, 그 내용은 그 참석자들은 누구나 아는 내용이었고, 왕지고 역시 마찬가지인 주제였다.
고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장광설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웬간하면 내가 뜯어말렸겠지만, 또 중간중간 그만하시라고 했지만 아랑곳없이 쉴새없이 선생은 장광설을 펼쳤다.
내 기억에 그런 장광설이 1시간은 넘었고, 한시간 반 정도였다고 기억한다.
내가 미치는 줄 알았다. 아다시피 내가 누구 눈치 보는 사람인가?
그런 나조차도 제어 통제 불가능하게 일대 장광설을 펼쳤으니, 그래서 선생은 편안했을지 모르나 누구나 불편한 그런 자리가 되고 말았다.
음식은 다 식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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