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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법운(法雲)

by taeshik.kim 2018.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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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이 재위 말년에 머리 깎고 중이 되어 얻었다는 법호. 하지만 그 역사적 진실성을 두고 논란이 많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흥왕 : 37년(576)…가을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고,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하다가 죽었다. 왕비 또한 그것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다가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 승려 법운은 속명을 삼맥종(彡麥宗)이라 하며,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했다. 법흥왕 동생 갈문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김씨다. 태어나 7세에 즉위하니 매우 관대하고 인자했다. 일을 공경히 다스려 신뢰를 받았으며, 착한 일을 들으면 놀란 듯이 (포상했고) 악을 제거하는데 힘썼다. 7년(546)에 흥륜사가 완성되니 사람들에게 출가해 승니가 됨을 허락했다. 8년(547)에는 대아찬 칠부(柒夫) 등에게 명해 문사(文士)를 널리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케 했다. 10년(549)에는 양에서 사신과 입학승 각덕(覺德)을 보내면서 부처님 사리도 함께 보내왔다. 왕은 여러 신하에게 흥륜사 앞 길까지 나아가 받들어 맞이하게 했다. 14년(553)에는 유사(有司)에 명하여 월동 동쪽에 신궁(新宮)을 짓게 하니 황룡이 그 땅에서 나타나므로 왕은 이를 의아히 여겨 불사(佛寺)로 고쳐 황룡(黃龍)이라 이름지었다. 26년(565)에는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면서 불교 경론 700여 권을 보내왔다. 27년(566)에는 기원(祈園).실제(實際) 두 절이 창건되고 황용사 또한 완공되었다. 33년(572) 10월에는 전사한 군인들을 위해 외사(外寺)에 팔관재회(八關齋會)를 베풀었는데 7일만에 마쳤다. 35년(574)에는 황룡사의 장륙상을 주조하였다. 혹 전하기를 아육왕(阿育王)이 띄운 배가 황금을 싣고 사포(絲浦)로 들어왔으므로 (그것을) 가져와 주조했다고도 하는데 이 말은 자장전(慈藏傳)에 있다. 36년(575)에는 장륙에서 눈물이 나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일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다가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법복을 입고 스스로 법운이라 이름했다. 금지해야 할 계율을 받아 지니고 세 가지 업을 청정히 하다가 마침내 세상을 마치셨다. 그가 돌아가자 나라 사람들은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예의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이해에 안함법사(安含法師)가 수나라에서 왔으니 안함전에서 말하겠다. 찬하여 말한다. 풍속은 사람과 관계됨이 크다 할 것이다. 왕이 당시 풍속을 고치고자 하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았으니 그 패연함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처음에 진흥이 이미 불교를 숭상해 화랑들의 놀이를 베푸시니 나라사람들이 즐거이 좇아 본받기를 마치 보물의 집으로 달려가고 봄의 누각에 오르듯 했다. 그 귀추를 요약하면 선으로 옮기고 의로 옮겨 점차 대도로 나아가게 하는데 있을 뿐이다. 저 한나라 애제는 부질없이 색만 좋아했기에 반고가 이르기를 "보드랍고 아름다운 것이 사람의 마음을 쏠리게 함은 비단 여자만이 아니라 남색 또한 그러하다"고 했다. 이것을 평하여 (화랑의 이야기와)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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