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북은 字가 칠칠七七**이니 자 또한 기이하다. 산수와 가옥 및 나무를 잘 그리니 필치가 짙고 무게가 있었다. 황공망黃公望을 사숙私淑하더니 끝내는 자기의 독창적인 의경意境으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스스로 호를 호생관毫生館이라 했다.
사람됨이 격분을 잘 하며 외곬수였으며 자잘한 예절에 얽매이지 않았다.
일찍이 어떤 집에서 한 달관達官을 만난 일이 있다. 그 달관이 최북을 가리키면서 주인에게 묻기를 “저쪽에 앉아 있는 사람은 姓이 뭔가?”라고 하니 최북은 얼굴을 치켜들고 달간을 보면서 “먼저 묻건대 그대의 성은 무엇이오”라고 했다.
최북의 오만함이 이와 같았다.
금강산金剛山을 유람하다가 구룡연九龍淵에 이른 그는 갑자기 “천하의 명사名士인 내가 천하의 명산名山에서 죽는 것이 족하다”고 소리치고는 못에 뛰어들었는데 하마터면 구하지 못할 뻔했다.
한 귀인貴人이 최북의 그림을 한 점 얻으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협박했다.
분노한 최북은 “남이 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고 하더니 곧바로 자기 눈 하나를 찔러 멀게 했다.
늙어서는 한 쪽에만 안경을 낄 뿐이었다. 나이 마흔 아홉에 죽으니, 사람들은 七七을 字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여겼다.
호산거사壺山居士는 말한다.
“최북의 풍모가 매섭구나. 왕공.귀인의 노리갯감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스스로를 괴롭힘이 이와 같아야 한단 말인가?”
조희룡趙凞龍(1789-1866)이 지은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수록된 최북전崔北傳이란 글이다.
**최북이 字로 썼다는 七七은 아마도 칠칠맞다고 할 때의 七七을 희화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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