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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아도(阿道) - 화상(和尙)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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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했다고 하는 고구려 출신 승려. 하지만 그 활동시기와 내력에는 혼란이 적지 않다. 신라 제21대 비처왕(毗處王) 시대에 시자(侍者) 셋을 데리고 일선군에 들어와 포교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미추왕 시대에 신라에 왔다는 설도 있다. 출생과 관련해서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도 하고, 오(吳)나라 출신이라는 이설도 있다. 아도비(我道碑)에는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이 조위(曹魏) 사람 아굴마(我堀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 관계해 낳은 아들이라 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15년(528)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하였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하였다. 그때 양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의 이름과 쓸 바를 몰랐으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묻게 하였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하였다.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는데,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는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고, 셋째는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의 딸이 병이 심하였으므로 왕은 묵호자로 하여금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하였더니, 왕의 딸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궁궐에서]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의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하였는데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가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였는데 신봉자가 가끔 있었다. 이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뭇 신하들이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였으므로 왕이 난처하였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 <혹은 처도(處道)라고도 하였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들의 논의를 진정시키십시오.” 왕이 말하였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함인데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자 [이차돈이] 대답하였다.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하였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하여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 등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왕이 말하였다. “뭇 사람들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였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 기록에 의거하여 쓴 것인데,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의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해동고승 권1 법공(法空) 전 : 법공(法空)은 신라 제23대 법흥왕이다. 이름은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원자(元子)이니,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왕은 키가 7척이며 너그럽고 덕이 있어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신령스럽고 거룩해서 만백성이 밝게 믿었다. 3년(516)에는 용이 양정(楊井) 안에서 나타났고, 4년(517)에는 처음으로 병부(兵部)를 두었으며, 7년(520)에는 율령을 반시하고 처음으로 백관의 주자지질(朱紫之秩)을 정했다. 즉위한 후 항상 불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하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으므로 왕은 그렇게 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아도(阿道)의 지극한 바람을 생각해 신하들을 불러 묻기를 "성조 미추왕께서는 아도와 함께 처음으로 불교를 펴려 하셨지만 큰 공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이후로) 능인(能仁·석가)의 묘한 교화가 막혀 행해지지 못했으니 나는 매우 슬프게 생각하오. 마땅히 큰 가람을 세우고 다시 상(像)을 조성해 선왕의 공적을 따라 좇으려 하는데 그대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라고 했다.…아도비를 살펴보면, 법흥왕은 출가하여 법명은 법운, 자는 법공이라 했다고 돼 있지만, 지금은 국사와 수이전을  참고하여 두 개의 전기로 나누었으니, 옛 것을 좋아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삼국유사 권 제3 흥법(興法) 제3 아도기라(阿道基羅) :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세 사람을 데리고 역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그는 여기에서 몇 해를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고,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간혹 믿는 사람이 생겼다(주<注>에 말하기를 "본비<本碑>와 모든 전기<傳記>와는 사실이 다르다"고 했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서천축<西天竺> 사람이라고 하고, 혹은 오<吳>나라에서 왔다고 한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상고해 보면 이렇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다. 어머니는 고도녕(高道寧)이니, 정시(正始) 연간(240~248)에 조위(曹魏) 사람 아(我·아<我>는 성이다)굴마(堀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녕과 간통하고 돌아갔는데 이로부터 태기가 있었다.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어머니가 그를 출가케 하니, 나이 16세에 위(魏)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이 강독하는 자리에 나가서 불법을 배웠다. 19세가 되자 다시 돌아와 어머니를 뵙자 어머니가 말했다. "이 고구려는 지금까지도 불법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3,000여 달이 되면 계림(鷄林)에서 성왕(聖王)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 나라 서울 안에 일곱 절터가 있으니, 하나는 금교(金橋) 동쪽 천경림(天鏡林·지금의 흥륜사<興輪寺>다. 금교<金橋>는 서천(西川)의 다리지만, 솔다리[松橋]라 잘못 부른다. 절은 아도화상이 처음 그 터를 잡았는데 중간에 폐해졌다가 법흥왕 정미(丁未)(527)에 이르러 공사를 시작하고 을묘년에 크게 공사를 일으키고 진흥왕 때이루어졌다)이요, 둘은 삼천(三川歧)(지금의 영흥사<永興寺>이니 흥륜사와 같은 시기에 세워졌다)요, 셋은 용궁(龍宮) 남쪽(지금의 황룡사<皇龍寺>다. 진흥왕 계유년<553>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넷은 용궁(龍宮) 북쪽(지금의 분황사<芬皇寺>다. 선덕왕<善德王> 갑오년<634>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다섯은 사천尾(沙川尾)(지금의 영묘사<靈妙寺>다. 선덕왕 을미년<635>에 공사가 시작되었다)이요, 여섯은 신유림(神遊林·지금의 천왕사<天王寺>로 문무왕 기묘년<679>에 공사가 시작됐다)이요, 일곱은 서청전(婿請田)(지금의 담엄사<曇嚴寺>다)이다. 이것은 모두 전불(前佛) 시대 절터니 불법이 앞으로 길이 전해질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불교 개조(開祖)가 될 것이다." 아도(我道)는 이 가르침을 듣고 계림(鷄林)으로 가서 왕성(王城)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곧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다, 때는 미추왕(未鄒王) 즉위 2년 계미(癸未·263)였다. 그가 대궐로 들어가 불법(佛法) 행하기를 청하니 당시 세상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어서 이를 꺼리고, 심지어는 죽이려는 자까지 있었다. 이에 속림(續林; 지금의 일선현一善縣) 모록(毛祿)의 집(록<綠>은 예<禮>와 글자 모양이 비슷한 데서 생긴 잘못이다. 《고기古記》에 보면 법사<法師>가 처음 모록<毛祿>의 집에 오니 그때 천지가 진동했다. 당시 사람들은 중이라는 명칭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아두삼마<阿頭彡麽>라 불렀다. 삼마<彡麽>는 우리말로 중이니 사미<沙彌>란 말과 같다)으로 도망해 가서 숨었다. 미추왕(未鄒王) 3년에 성국공주(成國公主)가 병이 났는데 무당과 의원의 효험도 없으므로 칙사(勅使)를 내어 사방으로 의원을 구했다. 법사(法師)가 갑자기 대궐로 들어가 드디어 그 병을 고치니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묻자 법사(法師)는 대답했다. "빈도(貧道)에게는 아무 구하는 일이 없고,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서 크게 불교를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빌기를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해 공사를 일으키도록 명했다. 그때 풍속은 질박하고 검소하여 법사는 따로 지붕을 덮고 여기에 살면서 강연(講演)하니, 이때 혹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지므로 그 절을 흥륜사(興輪寺)라고 했다. 모록(毛祿)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와서 중이 되어 역시 삼천기(三川歧)에 절을 세우고 살았으니 절 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고 했다.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鄒王)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 사람들이 해치려 하므로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문을 닫고 자절(自絶)하여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교 또한 폐해졌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514)에 왕위에 올라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263)에서 252년이나 된다. 고도녕이 말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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