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702년.. 원효와 더불어 신라 중기를 대표하는 고승이다. '義湘(의상)'이라고도 쓴다. 한반도 화엄종 개조로 통한다. 속성 김씨로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29세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고 원효(元曉)와 더불어 당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혼자서 갔다. 지엄 문하에서 현수와 더불어 화엄종을 연구하고 670년 귀국했다. 유학 중에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멸하고 그곳을 점령한 당군이 신라를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본국에 전달했다. 귀국 후인 문무왕 16년(676)에는 왕명에 따라 부석사를 창건했다.
삼국사기 권 제7(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 : 16년(676) 봄 2월에 고승 의상(義相)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이때 당나라의 유병(游兵)과 여러 장병(將兵)들이 진(鎭)에 머물러 있으면서 장차 우리 신라(新羅)를 치려고 했으므로 왕이 알고 군사를 내어 이를 쳤다. 이듬해에 당나라 고종(高宗)이 인문(仁問) 등을 불러들여 꾸짖기를, "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해다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나서 이제 우리를 침해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하고 이내 원비(圓扉)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으로 장수를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유학(留學)하러 당나라에 갔다가 인문을 찾아보자 인문은 그 사실을 말했다. 이에 의상이 돌아와서 왕께 아뢰니 왕은 몹시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를 모아 놓고 이것을 막아 낼 방법을 물었다....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또 부산성(富山城)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3년 만에 마치고 안북하변(安北河邊)에 철성(鐵城)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城郭)을 쌓으려 하여 이미 관리(官吏)를 갖추라고 명령하자 그때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이 말을 듣고 글을 보내서 아뢰었다. "왕의 정교(政敎)가 밝으시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이라 해도 백성들은 감히 이것을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씻어 깨끗이 하고 모든 것이 복이 될 것이나, 정교(政敎)가 밝지 못하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다 하더라도 재화(災禍)를 없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왕은 이 글을 보고 이내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의상전교(義湘傳敎) : 법사(法師) 의상(義湘)은 아버지가 한신(韓信)이요 성(姓)은 김씨(金氏)다. 나이 29세에 서울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얼마 안 되어 중국으로 가서 부처의 교화(敎化)를 보려고 마침내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 변방으로 갔으나 여기에서 변방 순라군(巡邏軍)이 간첩(間諜)으로 잡아 가둔 지 수십일 만에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이 사실은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의상본전<義湘本傳>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행장<行狀>에 있다). 영휘(永徽) 초년에 마침 당나라 사신이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지라 그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양주(揚州)에 머물렀는데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의상에게 요청해 관청에 머무르게 하고 대접함이 매우 성대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지엄(智儼)을 뵈니 지엄은 그 전날 밤 꿈에 큰 나무 하나가 해동(海東)에서 나니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까지 와서 덮고, 가지 위에는 봉황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마니보주(摩尼寶珠) 하나가 있어 그 광명(光明)이 먼 곳까지 비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자 놀랍고 이상해 집을 깨끗이 소제하고 기다리니 의상이 오므로 지엄은 특별한 예로 그를 맞아 조용히 말하기를 “내가 꾼 어젯밤 꿈은 그대가 내게 올 징조였구려”라고 했다. 이에 입실(入室)할 것을 허락하니 의상은 화엄경(華嚴經)의 깊은 뜻을 세밀한 곳까지 해석했다. 지엄은 영질(영質)을 만나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새로운 이치를 터득해 내니 이야말로 깊이 숨은 것을 찾아내서 남천(藍천)이 그 본색(本色)을 잃은 것이라 하겠다. 이 때 이미 본국 승상(丞相) 김흠순(金欽純. 혹은 인문<仁問>ㆍ양도<良圖> 등이 당나라에 갇혀 있었는데 고종<高宗>이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 하자 흠순 등이 몰래 의상에게 부탁해 먼저 돌아가게 하니 함형(咸亨) 원년 경오(庚午. 670)에 본국으로 돌아와 이 일을 본국 조정에 알리니 신인종(神印宗)의 고승(高僧) 명랑(明朗)에게 명하여 밀단(密壇)을 가설(假說)하고 비법(秘法)으로 기도해서 국난(國難)을 면할 수 있었다. 의봉(儀鳳) 원년(676)에 의상은 태백산(太伯山)에 돌아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고 대승(大乘)을 폈더니 영험이 많이 나타났다. 종남문인(終南門人) 현수(賢首)가 <수현소(搜玄疏)>를 지어서 부본(副本)을 의상에게 보내고, 아울러 은근한 뜻이 담긴 다음과 같은 편지를 올렸다. 서경(西京) 숭복사(崇福寺) 중 법장(法藏)이 해동(海東) 신라 화엄법사(華嚴法師)의 시자(侍者)에게 글을 올립니다. 한 번 작별한 지 20여 년이 되니 사모하는 정성이 어찌 마음속에서 떠나겠습니까. 게다가 연기와 구름이 1만 리나 되고 바다와 육지가 천 겹이나 쌓였으니 이 몸이 다시 뵙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회포와 그리움을 어찌 다 말하오리까. 전생(前生)에 인연을 같이 했고, 금세(今世)에 학업을 함께 닦았으므로 이 과보(果報)를 얻어 함께 대경(大經)에 목욕하고, 선사(先師)의 특별한 은혜로 깊은 경전(經典)의 가르침을 입게 된 것입니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께서는 고향에 돌아가신 후로 화엄경(華嚴經)을 강연해서 법계(法界)의 무애(無厓)한 연기(緣起)를 드날려 겹겹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게 하여 중생(衆生)에게 이익을 주심이 크고 넓다 하니 기쁜 마음 더해집니다. 이로써 여래(如來)가 돌아가신 후에 불교를 빛내고 법륜(法輪)을 다시 굴려 불법(佛法)을 오래 머물게 한 분은 오직 법사(法師)뿐임을 알겠습니다. 법장(法藏)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 하나도 이루는 것이 없고 주선하는 일이 더욱 적사오니, 우러러 이 경전(經典)을 생각하니 선사(先師)께 부끄러울 뿐입니다. 오직 분수에 따라 받은 바를 잠시도 놓칠 수 없으니 이 업(業)에 의지하여 내세(來世)의 인연을 맺기를 원할 뿐입니다. 다만 스님의 장소(章疏)는, 뜻은 풍부하지만 글이 간결하여 후세(後世)사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님의 깊은 말씀과 미묘한 뜻을 기록하여 의기(義記)를 이루었습니다. 요새 이것을 승전법사(勝詮法師)가 베껴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그 지방에 전할 것입니다. 하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그 잘잘못을 자세히 검토하셔서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마땅히 내세(來世)에는 사신수신(捨身受身)하여 함께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이와 같은 끝이 없는 묘법(妙法)을 듣고, 이와 같은 무량(無量)한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원행(願行)을 수행(修行)한다면 제 남은 악업(惡業)은 하루아침에 떨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상인(上人)께서는 옛날 일을 잊지 마시고 제취(諸趣) 중에서 정도(正道)로써 가르쳐 주소서. 인편(人便)이 있으면 때때로 안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갖추지 못합니다. (이 글은 대문류<大文類>에 실려 있다.) 의상이 이에 영(令)을 내려 10곳에서 불교를 전하니 태백산 부석사, 원주(原州) 비마라사(毗摩羅寺),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 비슬산(毗瑟山) 옥천사(玉泉寺), 금정산(金井山) 범어사(梵魚寺), 남악(南嶽) 화엄사(華嚴寺) 등이 이것이다. 또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略疏)를 지어서 일승(一乘)의 요점을 모두 기록하여 천 년의 본보기가 되게 하니 이를 여러 사람이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이밖에는 저술한 것이 없으니 온 솥의 고기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한 것이다. 법계도(法界圖)는 총장(總章) 원년 무진(戊辰. 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智儼)도 세상을 떠나니 이는 마치 공자(孔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끊은 것과 같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의상은 금산보개(金山寶蓋)의 화신(化身)이라 하는데 그의 제자에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勳)·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 고승이 영수(領首)가 되니 그들은 모두 아성(亞聖)들이며 각각 전기(傳記)가 있다.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골암사(골암寺)에 살면서 밤마다 팔을 뻗쳐서 부석사 석등(石燈)에 불을 켰다. 지통은 추동기(錐洞記)를 지었는데, 그는 대개 친히 의상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묘한 말이 많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佛國寺)에 살았으며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했다. 의상이 황복사(皇福寺)에 있을 때 여러 무리와 함께 탑을 도니, 항상 허공을 밟고 올라가 층계는 밟지 않았으므로 그 탑에는 사리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 무리들도 층계에서 3척이나 떠나 허공을 밟고 돌았기 때문에 의상은 그 무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가르치지 못한다.” 이 나머지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본전(本傳)과 같다. 찬(讚)해 말한다. 덤불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연기와 티끌 무릅쓰니 / 지상사(至相寺) 문이 열려 귀한 손님 접대했네 / 화엄(華嚴)을 캐다가 고국(故國)에 심었으니 / 종남산(終南山)과 태백산(太伯山)이 함께 봄 맞았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승전촉루(勝詮髑髏) : 중 승전(勝詮)은 그 내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일찍이 배를 타고 중국에 가서 현수국사(賢首國師)의 강석(講席)에 나가 현언(玄言)을 받아 정미한 것을 연구하여 생각을 쌓고, 보는 것이 슬기롭고 뛰어나 깊은 것과 숨은 것을 찾아 그 묘함이 심오(深奧)함을 다하였다. 이에 그는 인연 있는 곳으로 가고자 하여 고국(故國)으로 돌아올 마음을 가졌다. 처음에 현수(賢首)는 의상(義湘)과 함께 배워 지엄화상(智儼和尙)의 사랑스런 가르침을 받았다. 현수는 스승의 말에 대하여 글뜻과 과목(科目)을 연술(演述)하여, 승전법사(勝詮法師)가 고향에 돌아가는 것을 기회로 이 글을 보내니 의상도 역시 글을 보냈다 한다. 그 별폭(別幅)에는 이렇게 말했다. "《탐현기(探玄記)》 20권 중에서 두 권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고, 《교분기(敎分記)》 3권, 《현의장등잡의(玄義章等雜義)》 1권, 《화엄범어(華嚴梵語)》 1권, 《기신소(起信疎)》 2권, 《십이문소(十二門疎)》 1권, 《법계무차별론소(法界無差別論疏)》 1권을 모두 옮겨 베꼈으니 승전법사 편에 보내드립니다. 저번에 신라의 중 효충(孝忠)이 금 9푼을 갖다 주면서 상인(上人)이 보낸 것이라고 하오니, 비록 편지는 받지 못했지만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인도의 군지조관(軍持조灌) 한 개를 보내어 적은 정성을 표하오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아룁니다." 승전법사가 돌아오자 이 현수의 글을 의상에게 전했다. 의상은 법장(法藏)의 이 글을 보니 마치 지엄(智儼)의 가르침을 친히 듣는 것과 같았다. 수십 일 동안 탐색(探索)하고 연구하여 제자들에게 주어 이 글을 널리 연술(演述)시켰으니, 이 말은 의상의 전기에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5 효선(孝善) 제9 진정사(眞定師) 효선쌍미(孝善雙美) : (법사(法師) 진정(眞定))이 일찍이 군대에 있을 때 사람들이 의상법사(義湘法師)가 태백산맥에서 설법(說法)을 하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말을 듣고 금시에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 어머니께 고했다. "효도를 마친 뒤에는 의상법사에게 가서 머리 깍고 도를 배우겠습니다." 어머니는 말했다. "불법(佛法)은 만나기 어렵고, 인생(人生)은 너무나 빠른 것이니, 효도를 마친 후라면 또한 늦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찌 내 죽기 전에 네가 불도(佛道)를 아는 것만 하겠느냐. 주저하지 말고 빨리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정은, "어머님 만년에 오직 제가 옆에 있을 뿐이온데 어찌 버리고 출가할 수 있겠습니까"했다. 어머니는 "아! 나를 위해서 출가를 하지 못한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록 생전에 삼뢰칠정(三牢七鼎)으로 나를 봉양하더라도 어찌 가히 효도가 되겠느냐. 나는 의식(衣食)을 남의 문간에서 얻더라도 또한 가히 천수(天壽)를 누릴 것이니 꼭 내게 효도를 하고자 하면 네 말을 말라"고 하였다. 진정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는데 어머니가 즉시 일어나서 쌀자루를 모두 털어 보니 쌀 일곱 되가 있었다. 그날 이 쌀로 밥을 짓고서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밥을 지어 먹으면서 가자면 더딜까 두려우니 마땅히 내 눈앞에서 그 한 되 밥을 먹고 엿 되 밥은 싸 가지고 빨리 떠나거라." 진정은 흐느껴 울면서 굳이 사양하며 말했다. "어머님을 버리고 출가함이 그 또한 자식된 자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며칠 동안의 미음거리까지 모두 싸 가지고 떠난다면 천지가 저를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세 번 사양했으나 어머니는 세 번 권했다. 진정은 그 뜻을 어기기 어려워서 길을 떠나 밤낮으로 3일 만에 태백산에 이르러 의상에게 의탁하여 머리 깍고 제자가 되어 이름을 진정이라 했다. 3년 후 어머니의 부고가 오자 진정(眞定)은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7일 만에 나왔다.설명하는 이는 말하기를 "추모와 슬픔이 지극하여 거의 견딜 수 없었으므로 정수(定水)로써 슬픔을 씻은 것이다"했다. 혹은 "선정(禪定)으로써 어머니께서 사시는 곳을 관찰하였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실리(實理)와 같이 해서 명복을 빈 것이다"하였다. 선정(禪定)을 하고 나온 뒤에 그 일을 의상(義湘)에게 고하니 의상은 문도(門徒)를 거느리고 소백산 추동(錐洞)에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의 무리 3천 명을 모아 약 90일 동안 화엄대전(華嚴大典)을 강론했다. 강론하는 데 따라 문인(門人) 지통(智通)이 그 요지를 뽑아 책 두 권을 만들고 이름을 <추동기(錐洞記)>라 하여 세상에 널리 폈다. 강론을 다 마치고 나니 그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나는 이미 하늘에 환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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