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족보는 호적과 상호보완성도 갖지만
어쩔수 없는 한계가 있다.
조상을 현창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후대의 위조와 추숭이 계속 위에 더해져
원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으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족보만으로는 과거를 제대로 들여다 볼수 없으며
호적이 여기에 더해지면 비로소 당시의 정확한 실상을 보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이는 호적 자료에 17세가 말~18세기 초반
직역이 업무나 업유로 기록되었다.
17세기에 직역이 업무라면 어쨌건 말단이라도 양반은 양반 혹은 상급의 중인 직역으로
비록 군역은 면제받지만 이 자체는 완전한 양반이라고는 할 수 없어
주로 하급 양반들, 특히 서자들 자손에게 많이 부여되었다.
조선 후기 정부에서 "양반을 모칭하며 놀고 먹는자들"이라고 하면
백프로 이 계층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양반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은 아니며
대개 조상이 양반이지만 너무 지손으로 밀려나 여러대를 지났거나
그게 아니면 서자의 후손인 사람들이다.
이 경우에도 부인의 호칭은 "씨"로 되어 있어
"성"이나 "소사"로 불린 중인이나 평민보다는 약간 위이되
이 직역의 사람들이 매우 신분 보장에 있어 취약하다는 것은
균역법 시행 초기 그 중 일부가 선무군관으로 잡혀와
군포 1필씩을 내는 경우가 있었다는 거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이 경우도 오래가지 못해 다시 업무나 유학으로 복귀하지만.
이 직역의 사람들 중에 양반 직역을 완전히 상실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18세기 초-중반이 되면 모두 유학호를 획득하며 이를 대물림 하는데
18세기 후반 경이 되면 이 유학호를 획득한 후손이
업무였던 조상들에 대한 윤색을 시작한다.
업무라는 직역을 바꿀수 있는 방법은
산계의 벼슬을 받는 것이다.
우선 자신이 먼저 산계 벼슬을 하나 받아 (백프로 공명첩이다)
본인 직역을 유학에서 그 고위직 산계 벼슬로 바꾸고
다음에는 조상도 공명첩을 사서 추증한다.
이미 돌아가신 분을 호적에서 어떻게 추증하나?
부, 조부, 증조부 3대를 호적에는 적게 되어 있으므로
바로 이 부분을 공명첩 받아 추증한 벼슬로 바꾸는 것이다.
산계의 벼슬이 없다면 직역은 "유학"이나 "업무"로 적어야 해서
"업무"가 되는 경우 반쪽짜리 양반이라는 것을 자임하는 꼴이지만,
산계벼슬이라도 어쩃건 하나 장만하게 되면
"업무"라는 직역은 더 이상 안써도 된다.
산계 벼슬을 그 직역 자리에 써 넣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호적이 아주 폼나게 바뀐다.
자신부터 위로 3대가 모두 괜찮은 벼슬을 받은 집안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그 벼슬을 족보에 올리는 것이다.
원래 공명첩으로 산 벼슬의 고신에는
곡식 바쳐 샀다는 뜻의 "납"짜가 적혀 있지만
호적이나 족보에는 그런거 없이 그냥 그 벼슬 이름 그대로 올린다.
이렇게 하면 위로 3대 정도는 그 벼슬로 직역을 바꿀수 있다.
흔히 족보만 보고 대대로 벼슬을 했다는 것으로
우리집안은 대대로 양반이었다고 자임하는 경우도 보는데
그 집안에 과거 출신의 기록이 없다면
높은 확률로 이렇게 산계벼슬을 사서 치장한 경우이다.
물론 이렇게 바꾸는 것은 제대로 된 양반이 아니다는 비판도 학계에 있는것으로 아는데,
영국 젠트리가 18세기에 제대로 된 놈들이 아니라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비판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겠지만
이것이 2-3대 내려가면 그런 이들이 전통의 명문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19세기 말 자신들은 양반 후손이라 주장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호적과 족보를 고친 후 등장했을 것이라 본다.
우리는 족보와 호적을 바꾸는 것을 그냥 슥슥 바꿔 적어 사기를 쳤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족보야 그렇다 쳐도 호적은 보는 사람들 눈이 많아 이런 복잡한 방법이 아니면
쉽게 고쳐 넣을 수 없었다.
아무튼 이렇게 대대로 벼슬을 한 집안으로 족보와 호적을 바꾸는데
원래 직역이 유학 바로 아래 업무 혹은 업유였던 이도 몇대는 걸린다.
그 출발점이 업무 업유보다 더 아래 직역이었다면,
예를 들어 평민이나 노비가 시작점이었다면
자신이 속량하거나 양반 직역부터 획득해야 하니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우리가 양반을 모칭한다는 것을
구봉서 배삼룡 선생이 코메디에서 묘사했듯이
어느날 던 있는 자가 족보사서 갑자기 모칭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양반으로 호적 족보 모두 세탁하려면
몇대는 꾸준히 노력해야 하고
집요하게 달라붙어 작업해야 했다.
이런 사람들이 19세기에 동네마다 가득했으니
그들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었겠는가?
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활동하며
사회에 활력 내지는 불안을 불어 넣는 것이
바로 19세기였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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