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 미상. 신라. 김유신 마누라. 태종무열왕 김춘추 딸인데 그 어머니는 문명(文明)일 가능성이 크다. 문명은 김유신 동생이니 외삼촌과 근친혼을 했다. 슬하에 원술 이하 여러 아들을 두었으며 그들 모두 현달했다. 지조(智照)라고도 한다. 성덕왕 11년(712),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 권제43 (열전 제3) 김유신下 : 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대왕 셋째 딸이다. 아들 다섯을 낳으니 맏이 이찬 삼광(三光)이요, 다음은 소판 원술(元述)이요, 다음은 해간(海干) 원정(元貞)이요, 다음은 대아찬 장이(長耳)이며, 다음은 대아찬 원망(元望)이다. 딸은 넷이다. 또 서자(庶子)로 아찬 군승(軍勝)이 있는데, 그 어머니 성씨는 전하지 않는다. 뒤에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거친 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때 대왕이 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중앙과 지방이 편안하고 군신이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곧 태대각간의 공이니, 생각컨대 부인이 집안을 잘 다스리어 조심하고 훈계함이 짝하여 숨은 공이 컸으므로, 과인이 그 덕에 보답하려는 마음을 일찍이 하루라도 잊은 적이 없소. 남성(南城)의 조(租)를 매년 1천 섬씩 주겠소.” 후에 흥덕대왕이 공[유신]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책봉하였다. 그 전에 법민왕(法敏王)이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소유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군사를 보내 치게 하였다. 당나라 군대가 말갈(靺鞨)군과 함께 석문(石門) 들에 주둔하니, 왕이 장군 의복(義福)·춘장(春長) 등을 보내 방어케 하였는데, [이들은] 대방(帶方)의 들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이때 장창당(長槍幢)만이 따로 주둔하다가 당나라 군사 3천여 명을 만나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으로 보냈다. 이에 여러 당(幢)에서 함께 말하기를 “장창당(長槍幢)이 홀로 진을 쳤다가 성공하였으니 반드시 후한 상을 얻을 것이다. 우리들이 모여 있는 것은 한갓 수고로울 뿐이다.”라고 하면서 드디어 각각 자기 군대를 갈라 분산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들이] 미처 진을 치지 아니한 틈을 타서 공격하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장군 효천(曉川)과 의문(義文) 등이 죽었다. 유신의 아들 원술(元述)이 비장(裨將)이었는데 또한 싸워 죽으려고 하므로, 그를 보좌하는 담릉(淡凌)이 말리며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곳을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니, 만일 죽어서 성공이 없다면 살아서 후에 공을 도모함만 같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원술이] 대답하기를 “남아는 구차롭게 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나의 아버지를 뵙겠는가?” 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려고 하니 담릉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죽지 못하고, 상장군(上將軍)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오니 당나라 군대가 뒤를 추격하였다. 거열주(居烈州) 대감(大監) 일길간(一吉干)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하기를 “공 등은 힘을 다하여 빨리 떠나가라! 내 나이 이미 70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으랴? 이 때야말로 나의 죽을 날이다.” 하며 창을 비껴 들고 적진 가운데로 돌입하여 전사하였는데, 그 아들도 따라 죽었다. 대장군 등은 슬며시 서울로 들어왔다. 대왕이 듣고 유신에게 “군사의 실패가 이러하니 어찌할까?” 하니, 대답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의 모책을 헤아릴 수 없사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각기 요소를 지키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가훈을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대왕이 말하기를 “원술은 비장(裨將)인데, 혼자에게만 중한 형벌을 시행함은 불가하다.” 하고 용서해 주었다. 원술이 부끄럽고 두려워서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 농장에 [가서] 숨어 다니다가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 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다. 어머니가 “부인(婦人)에게는 따라야 할 세 가지 의리(義理)가 있다. 내가 지금 과부가 되었으니 아들을 따라야 하겠지만, 원술 같은 자는 이미 선군(先君)에게 아들 노릇을 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 어머니가 될 수 있느냐?” 하고 만나 보지 아니하였다.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구르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였으나, 부인은 끝내 보지 아니하였다. 원술이 탄식하며 “담릉으로 그릇된 것이 이렇게까지 되었다!” 하고 이에 태백산(太伯山)으로 들어가고 말았다.을해년(문무왕 15년: 675)에 당나라 군사가 매소천성(買蘇川城)을 치니, 원술이 듣고, 죽어서 전의 수치를 씻으려 하여 드디어 힘써 싸워 공(功)과 상(償)을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벼슬하지 않고 한 세상을 마쳤다.
삼국사기 권제8(신라본기 8) 성덕왕 : 11년(712) ... 가을 8월에 김유신의 아내[妻]를 부인(夫人)으로 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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