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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진지왕(眞智王)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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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5대 왕. 생몰. 재위 생전에는 금륜(金輪) 혹은 사륜(舍輪)이라 했다 한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4 진지왕 :  진지왕(眞智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이고<혹은 금륜(金輪)이라고도 하였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원년(576) 이찬 거칠부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의 일을 맡겼다. 2년(577) 봄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군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천7백여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內利西城)을 쌓았다. 3년(578) 가을 7월에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백제에게 알야산성(閼也山城)을 주었다. 4년(579) 봄 2월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아 산산성(山城), 마지현성(麻知峴城), 내리서성의 길을 막았다. 가을 7월 17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은 이름이 사륜(舍輪)인데 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 김씨다. 아버지는 진흥(眞興)이며 어머니는 박영실(朴英失) 각간 딸이니, 식도(息途) 혹은 색도부인(色刀夫人)이라고도 한다. 박씨다. 비는 지도부인(知刀夫人)인데 기오공(起烏公) 딸로서 박씨다. 병신년(576)에 즉위해 4년을 다스렸다. 묘는 애공사(哀公寺)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거칠부(居柒夫)<황종(荒宗)이라고도 한다>는 성이 김씨(金氏)이며 나물왕 5대손이다. ...진지왕 원년 병신(576)에 거칠부는 상대등이 되어 군사와 국가의 중대한 일을 맡았다가 늙어 집에서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7년(687) ... 여름 4월에 음성서(音聲署)의 장관을 고쳐 경(卿)이라 하였다. 대신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리고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계승하여 지킴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돌보심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訟事)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怪變)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것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如在] 영혼 앞에 정성을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을 없게 하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를 갖추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넉넉한 것을 자손들에게 남겨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삼가 아룁니다.”


삼국유사 권1 왕력 : 제25대 진지왕(眞智王)은 이름이 사륜(舍輪)인데 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 김씨다. 아버지는 진흥(眞興)이며, 어머니는 박영실(朴英失) 각간 딸인데 식도(息途) 혹은 색도부(色刀夫人)이라고 한다. 비는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니 기오공(起烏公) 딸이다. 박씨다. 병신년에 서서 4년을 다스렸다. 묘는 애공사 북쪽에 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은 시호(諡號)가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다.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의 남편도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 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ㆍ미시랑(未尸郎)ㆍ진자사(眞慈師) : 국사國史에 보면,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경庚(병丙)신申에 처음으로 화랑花郞을 받들었다 했으나 이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미륵선화(彌勒仙花)ㆍ미시랑(未尸郎)ㆍ진자사(眞慈師) : 진지왕(眞智王) 때에 이르러 흥륜사(興輪寺) 중 진자(眞慈. 정자貞慈라고도 한다)가 항상 이 당(堂)의 주인인 미륵상(彌勒像) 앞에 나가 발원(發願)하여 맹세하기를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이 세상에 나타나 제가 항상 수용(수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을 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원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두터워지자, 어느 날 밤 꿈에 중 하나가 말했다. “네가 웅천(熊天) 수원사(水源寺)에 가면 미륵선화(彌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진자(眞慈)가 꿈에서 깨자 놀라고 기뻐하여 그 절을 찾아 열흘길을 가는데 발자국마다 절을 하며 그 절에 이르렀다. 문 밖에 탐스럽고 곱게 생긴 한 소년이 있다가 예쁜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하여 작은 문으로 데리고 들어가 객실로 안내하니, 진자가 올라가 읍(揖)하는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하여 이렇듯 은근하게 대접하는가”라고 하니 소년이 대답했다. “나 또한 서울 사람입니다. 스님이 먼 곳에서 오시는 것을 보고 위로했을 뿐입니다.” 이윽고 소년이 문 밖으로 나갔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자는 속으로 우연한 일일 것이라 생각하고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중들에게 지난밤 꿈과 자기가 여기에 온 뜻만 얘기하면서 또 이르기를 “잠시 저 아랫자리에서 미륵선화를 기다리고자 하는데 어떻겠소”라고 하니 절에 있는 중들은 그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지만 그의 근실한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서 명감(冥感)이 많다고 하오. 그곳으로 가 봄이 좋을 게요.” 진자가 그 말을 쫓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으로 변하여 나와 맞으면서 말했다.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진자가 대답하기를 “미륵선화를 보고자 합니다”고 하니 노인이 또 말했다. “저번에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를 보았는데 다시 무엇을 보려는 것인가.”  진자는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내 달려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그런 지 한 달이 넘어 진지왕(眞智王)이 이 말을 듣고는 진자를 불러 그 까닭을 묻고 말했다. “그 소년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했으니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 진자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들을 모아 두루 마을을 돌면서 찾으니 단장을 갖추어 얼굴 모양이 수려한 한 소년이 영묘사(靈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거닐며 놀고 있었다. 진자가 그를 만나보자 놀라서 말하기를 “이 분이 미륵선화다”고 했다. 그가 나가 묻기를 “낭(郎)은 댁이 어디시며 성(姓)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 낭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며 어렸을 때 부모를 모두 여의어 성이 무엇인지 모릅니다”고 했다. 이에 진자가 그를 가마에 태워 들어가 왕을 뵈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총애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을 삼았다. 그는 자제(子弟) 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예의(禮儀)와 풍교(風敎)가 보통사람과 달랐다. 그의  풍류(風流)가 빛남이 거의 7년이나 되더니 어느날 갑자기 간 곳이 없어졌다. 진자가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했다. 그러나 미시랑(未尸郎)의 자비스러운 혜택을 많이 입었고 맑은 덕화(德化)를 이어 스스로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도(道)를 닦으니, 만년(晩年)에 그 역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명하는 이가 말했다. “미(未)는 미(彌)와 음(音)이 서로 같고 시(尸)는 역(力)과 글자 모양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그 가까운 것을 취해서 바꾸어 부르기도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 인연이 있었기 때문에 가끔 나타났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가리켜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하는 사람들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진자의 유풍(遺風)이다. 노방수(路傍樹)를 지금까지도 견량(見郎)[樹]이라 하고 또 우리말로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한다. “선화(仙花) 찾아 한 걸음 걸으며 그의 모습 생각하니, 곳곳마다 재배함이 한결같았네. 문득 봄 되돌아가고 찾을 곳 영영 없으니, 누가 알았으랴, 상림(上林)의 一時春을” 


 ☞사륜(舍輪) ☞금륜(金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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