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632. 재위 579~632. 봄 정월신라 제26대 왕으로 본명은 백정(白淨)이며 시호(諡號)가 진평대왕(眞平大王)이다. 진흥왕의 태자로 있다가 일찍 죽은 동륜(銅輪)과 만호(萬呼) 사이에서 난 아들이다. 김씨(金氏)이며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579) 8월에 폐위된 진지왕을 대신해 13살로 왕위에 옹립되어 54년을 재위하다가 사망했다. 재위기간으로는 초대 박혁거세 이후 가장 길다.
舊唐書卷一 本紀第一 高祖 : 七年(624) 春正月 己酉에 高麗王 高武를 봉하여 요동군왕(遼東郡王)으로 삼고, 百濟王 부여장(扶餘璋)을 대방군왕(帶方郡王), 新羅王 김진평(金眞平)을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삼았다.(七年春正月己酉, 封高麗王高武爲遼東郡王, 百濟王扶餘璋爲帶方郡王, 新羅王金眞平爲樂浪郡王.)
舊唐書 권 제199上 列傳 제149上 東夷 新羅國 : 그 나라 王 金眞平이 隋 文帝 때에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을 除授받았다. 武德 4년(A.D.621; 新羅 眞平王 43)에 使臣을 보내어 朝貢을 바쳤다. 高祖는 친히 노고를 치하하고, 通直散騎侍郞 庾文素를 使臣으로 보내어 璽書 및 그림병풍과 비단 3百段을 하사했다. 이로부터 朝貢이 끊이지 않았다. …[武德] 7년(A.D.624; 新羅 眞平王 46)에 使臣을 보내어 金眞平에게 柱國을 제수하고, 樂浪郡王 新羅王에 책봉했다. 貞觀 5년(A.D.631; 新羅 眞平王 53)에 使臣을 보내어 女樂工 두 사람을 바쳤는데, 모두 머리가 새까만 美人들이었다. 太宗이 侍臣에게 “朕이 들으니 聲色을 즐기는 것은 德을 좋아함만 같지 못하다고 한다. 그리고 山川으로 가로 막혀 있으니, 고향을 그리워 할 것도 알 수 있다. 얼마 전에 林邑에서 바친 흰 앵무새도 오히려 고향을 그리워할 줄 알아 제 나라로 보내 줄 것을 하소연했다. 새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人情에 있어서랴! 朕은 그들이 멀리 떠나 와서 반드시 친척을 그리워할 것을 불쌍히 여긴다. 마땅히 使者의 편에 보내어 제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하라.” 했다. 이 해에 眞平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서 그의 딸 善德을 세워 王으로 삼고,宗室로서 大臣인 乙祭가 國政을 총괄해 맡아 보았다. 조서를 내려 眞平에게 左光祿大夫를 추증하고, 賻物 2백段을 내려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진평왕(眞平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용모였고 신체가 장대하고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아 사리에 통달하였다.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2년(580) 봄 2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으로 삼았다. 3년(581) 봄 정월에 처음으로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는데, 지금[고려]의 이부(吏部)와 같다. 5년(583) 봄 정월에 처음으로 선부(船府)의 관청을 설치하고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각 1인을 두었다. 6년(584) 봄 2월에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 3월에 조부(調府)에 영(令) 1인을 두어 조세를 관장하게 하였고, 승부(乘府)에 영 1인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7년(585) 봄 3월에 가물었으므로 왕이 정전(正殿)에 [거처하기를] 피하고 평상시의 반찬 가짓수를 줄였으며, 남당(南堂)에 나아가 몸소 죄수의 정상을 살폈다. 가을 7월에 고승 지명(智明)이 불법을 배우러 진(陳)나라에 들어갔다. 8년(586) 봄 정월에 예부(禮部)에 영 2인을 두었다. 여름 5월에 천둥과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이 떨어졌다. 9년(587) 가을 7월에 대세(大世)와 구칠(仇柒) 두 사람이 바다로 떠났다. 대세는 나물왕의 7세손 이찬 동대(冬臺)의 아들로, 자질이 뛰어났고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승려 담수(淡水)와 사귀며 놀던 어느날 말하였다. 이 신라의 산골에 살다가 일생을 마친다면, 못 속의 물고기와 새장의 새가 푸른 바다의 넓음과 산림의 너그럽고 한가함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오월(吳越)에 이르러 차차로 스승을 찾아 명산에서 도를 물으려 한다. 만약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신선(神仙)을 배울 수 있다면, 텅 비고 넓은 허공 위를 바람을 타고 훨훨 나를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놀이요, 볼만한 광경일 것이다. 그대도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대세는 물러나와 다시 벗을 구하였는데, 마침 구칠(仇柒)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기개가 있고 절조가 뛰어났다. 드디어 그와 함께 남산의 절에 놀러 갔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와 나뭇잎이 떨어져 뜰에 고인 물에 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하였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쪽으로 유람할 마음이 있는데, 지금 각자 나뭇잎 하나씩을 집어 그것을 배로 삼아 누구의 것이 먼저 가고 뒤에 가는 지를 보자.조금 후에 대세의 잎이 앞섰으므로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갈까 보다.”고 말하니, 구칠이 화를 발끈 내며 말하기를 “나 또한 남자인데 어찌 나만 못 가겠는가!” 하였다. 대세는 그와 함께 할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의 뜻을 은밀히 말하였다. 구칠이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바라던 바였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서로 벗삼아 남해(南海)에서 배를 타고 가버렸는데, 후에 그들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10년(588) 겨울 12월에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11년(589) 봄 3월에 원광법사(圓光法師)가 불법(佛法)을 배우러 진나라에 들어갔다. 가을 7월에 나라 서쪽에 홍수가 나서 민가 30,360호가 떠내려가거나 물에 잠겼고 죽은 사람이 200여 명이었다. 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그들을 진휼하였다. 13년(591) 봄 2월에 영객부(領客府)에 영(令) 2인을 두었다. 가을 7월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둘레가 2,854보였다. 15년(593) 가을 7월에 명활성을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3천 보였고, 서형산성(西兄山城)은 둘레가 2천 보였다. 16년(594) 수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상개부(上開府)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18년(596) 봄 3월에 고승 담육(曇育)이 불법을 배우러 수나라에 들어갔다.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영흥사에 불이 났는데, 불길이 번져 가옥 350채를 태웠으므로 왕이 몸소 나아가 진휼하였다. 19년(597) 삼랑사(三郞寺)가 완성되었다. 22년(600) 고승 원광이 조빙사(朝聘使)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橫川)을 따라 돌아왔다. 24년(602) 사신 대나마 상군(上軍)을 수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8월에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 왔으므로 왕이 장수와 사졸로 하여금 맞서 싸우게 하여 크게 쳐부수었으나 귀산(貴山)과 추항(項)이 전사하였다. 9월에 고승 지명이 입조사(入朝使)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왕이 지명의 계행(戒行)을 존경하여 대덕(大德)으로 삼았다. 25년(603) 가을 8월에 고구려가 북한산성에 침입하였으므로 왕이 몸소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막았다. 26년(604) 가을 7월에 사신 대나마 만세(萬世)와 혜문(惠文) 등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남천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27년(605) 봄 3월에 고승 담육이 입조사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 가을 8월에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침략하였다. 30년(608) 왕이 고구려가 자주 강역을 침략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려고 원광에게 명하여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니, 원광이 말하였다. 자기 살기를 구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승려로서의 행동이 아니나, 저[貧道]는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물과 풀을 먹고 있으니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이에 [글을] 지어서 아뢰었다. 2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방을 침략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 4월에 고구려가 우명산성(牛鳴山城)을 빼앗았다. 31년(609) 봄 정월에 모지악(毛只嶽) 아래의 땅이 불에 탔다. 그 넓이가 네 보(步)이고 길이가 여덟 보였으며 깊이가 다섯 자였는데, 10월 15일에 이르러 꺼졌다. 33년(611) 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려 군사를 청하니, 수 양제(煬帝)가 그것을 허락하였다. 군사를 움직인 일에 관해서는 고구려본기에 실려 있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가잠성(岑城)을 포위하여 100일이나 지속되었다. 현령(縣令) 찬덕(讚德)이 굳게 지켰으나 힘이 다하여 죽고 성은 함락되었다. 35년(613) 봄에 가물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 가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황룡사에 이르자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었는데, 원광 등의 법사(法師)를 맞이하여 불경을 강설하였다. 36년(614) 봄 2월에 사벌주를 폐하고 일선주를 설치하여, 일길찬 일부(日夫)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만든 불상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얼마 안 있어 진흥왕비인 비구니(比丘尼)가 죽었다. 37년(615) 봄 2월에 큰 잔치를 3일 동안 베풀고 술과 음식을 내려 주었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38년(616) 겨울 10월에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해 왔다. 40년(618) 북한산주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으려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는데, 해론(奚論)이 종군하여 적진에 나아가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죽었다. 해론은 찬덕(讚德)의 아들이다. 43년(621) 가을 7월에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당] 고조가 몸소 위문하고, 통직(通直) 산기상시(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를 보내 예방하고 조서와 그림병풍 및 채색비단 300단(段)을 주었다. 44년(622) 봄 정월에 왕이 몸소 황룡사에 거둥하였다. 2월에 이찬 용수(龍樹)를 내성 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 일찍이 왕 7년에 대궁(大宮), 양궁(梁宮), 사량궁(沙梁宮) 세 곳에 각각 사신(私臣)을 두었는데, 이때 이르러 내성사신 한 사람을 두어 세 궁(宮)의 일을 겸하여 관장하도록 하였다. 45년(623) 봄 정월에 병부에 대감(大監) 2인을 두었다. 겨울 10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였다. 46년(624) 봄 정월에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인을 두고, 상사서(賞賜署)에 대정(大正) 1인, 대도서(大道署)에 대정 1인을 두었다. 3월에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우리의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暫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縣城), 혈책성(穴柵城) 등 여섯 성을 에워쌌다. 이에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訥催)는 봉잠성, 앵잠성, 기현성의 세 성 군사와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47년(625)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울러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며 또 자주 [신라를] 침입한다고 호소하였다. 48년(626) 가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고조가 주자사(朱子奢)를 보내와, 조칙으로 고구려와 서로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8월에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하자 성주 동소(東所)가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高墟城)을 쌓았다.49년(627) 봄 3월에 큰 바람이 불고 흙이 비처럼 5일 넘게 내렸다. 여름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백제 장군 사걸(沙乞)이 서쪽 변방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8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죽였다.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년(628) 봄 2월에 백제가 가잠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쳐서 깨뜨렸다.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비내리기를 빌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려 자녀를 팔았다.51년(629) 가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인이 성을 나와 진을 벌려 치니 군세가 매우 성하여 우리 군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싸울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유신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끌어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했는데,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어야겠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들고는 적진으로 향하여 곧바로 나아가 세 번 들어가고 세 번 나옴에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의 목을 베고 혹은 깃발을 뽑았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북을 치며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이니, 그 성이 이에 항복하였다. 9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2년(630) 대궁(大宮) 뜰의 땅이 갈라졌다. 53년(631) 봄 2월에 흰 개가 궁궐 담장에 올라갔다. 여름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品)이 반란을 꾀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칠숙을 붙잡아 동시(東市)에서 목베고 아울러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아찬 석품은 도망하여 백제 국경에 이르렀다가 처와 자식을 보고싶은 생각에 낮에는 숨어 있고 밤에는 걸어 총산(叢山)에까지 돌아와,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해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가을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사람을 바치니, 위징(魏徵)이 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자 황제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저 임읍(林邑)에서 바친 앵무새도 오히려 추위의 괴로움을 말하면서 그 나라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는데, 하물며 두 여자는 멀리 친척과 이별함에 있어서랴! 이에 사신에게 부쳐 돌려 보냈다. 흰 무지개가 궁궐 우물에 들어가고 토성이 달을 범하였다. 54년(632) 봄 정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했다. 당 태종이 조칙을 내려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부의(賻儀)로 비단 2백 필을 주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정관(貞觀) 6년 임진(632) 정월에 죽었다’고 했다. 하지만 《신당서(新唐書)》 와 《자치통감(資治通鑑)》 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631)에 신라 왕 진평이 죽었다’고 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은 이름이 백정(白淨)이다. 아버지는 동륜(銅輪)인데 동륜태자(東輪太子)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딸인 만호(萬呼)이니 만녕부인(萬寧夫人)이라고도 하니 이름은 행의(行義)이다. 선비(先妃)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로서 이름은 복힐◎(福盻◎)이다. 후비는 승만부인(僧滿夫人) 손씨이다. 기해년에 즉위했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 : 진평왕 건복 28년 신미(611)에 공은 나이 17세로, 고구려·백제·말갈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의분에 넘쳐 침략한 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嶽) 석굴에 들어가 재계(齋戒)하고 하늘에 [다음과 같이] 고하여 맹세하였다.“적국이 무도(無道)하여 승냥이와 범처럼 우리 강역을 어지럽게 하니 거의 평안한 해가 없습니다. 저는 한낱 미미한 신하로서 재주와 힘은 헤아리지 않고, 화란(禍亂)을 없애고자 하오니 하늘께서는 굽어살피시어 저에게 수단을 빌려주십시오!”머문지 나흘이 되는 날에 문득 거친 털옷을 입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였다.“이 곳은 독충과 맹수가 많아 무서운 곳인데, 귀하게 생긴 소년이 여기에 와서 혼자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유신이 대답하였다.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말하였다.“나는 일정하게 머무르는 곳이 없고 인연따라 가고 머물며, 이름은 난승(難勝)이다.” 공이 이 말을 듣고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에게] 두 번 절하고 앞에 나아가 말하였다.“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니, 마음이 아프고 근심이 되어 여기 와서 만나는 바가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애달피 여기시어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십시오!” 노인은 묵묵히 말이 없었다. 공이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기를 그치지 않고 여섯 일곱 번 하니 그제야 노인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마음을 가졌으니 또한 장한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비법(秘法)을 가르쳐 주면서 말하였다. “삼가 함부로 전하지 말라! 만일 의롭지 못한 일에 쓴다면 도리어 재앙을 받을 것이다.”말을 마치고 작별을 하였는데 2리쯤 갔을 때 쫓아가 바라보니, 보이지 않고 오직 산 위에 빛이 보일 뿐인데 오색 빛처럼 찬란하였다. 건복 29년(진평왕 34년: 612)에 이웃 나라 적병이 점점 닥쳐오자, 공은 장한 마음을 더욱 불러일으켜 혼자서 보검(寶劍)을 가지고 열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중악에서 맹서한 것처럼 하고, 이어서 “천관(天官)께서는 빛을 드리워 보검에 신령을 내려 주소서!”라고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밤에 허성(虛星)과 각성(角星) 두 별의 빛 끝이 빛나게 내려오더니 칼이 마치 흔들리는 듯하였다. 건복 46년 기축(진평왕 51년: 629) 가을 8월에 왕이 이찬(伊飡) 임말리(任末里), 파진찬(波珍飡)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蘇判) 대인(大因)·서현(舒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출동시켜 이를 맞아 치니, 우리편이 불리하여 죽은 자가 많고, 뭇 사람들의 마음이 꺾이어 다시 싸울 마음이 없었다. 유신이 그때 중당 당주(中幢幢主)였었는데, 아버지 앞에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우리 군사가 패하였습니다. 제가 평생 충효스럽게 살겠다고 기약하였으니, 전쟁에 임하여 용기를 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듣건대 ‘옷깃을 들면 가죽옷[]이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 하니, 제가 그 벼리와 옷깃이 되겠습니다.” 이에 말을 타고 칼을 빼어 들어 참호를 뛰어넘어 적진에 들락날락하면서 장군의 머리를 베어 들고 돌아왔다. 우리 군사들이 보고, 이기는 기세를 타서 맹렬히 공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고 1천 명을 사로잡으니,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모두 나와 항복하였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무왕(武王) : 제30대 무왕(武王)은 이름이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寡婦)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으로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여]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이름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이내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童謠)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하여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서동이 나와 공주에게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우연히 믿고 좋아하니 서동은 그를 따라가면서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백제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고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니 이것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것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것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한다. "내가 신통(神通)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 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금을 사자사(師子寺) 앞에 갖다 놓았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한다.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像)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삼국사三國史>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45(열전 제5) 귀산 열전 :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 무은(武殷)이다. 귀산이 어렸을 적에 같은 부(部)의 사람 추항(=項)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학문이 있고 덕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양하지 않으면 아마 치욕을 자초할지 모르겠다. 어찌 어진이에게 나아가서 도를 묻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에 나아가 옷자락을 걷어 잡고[衣] 말하기를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을 삼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였다.“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할 것,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할 것,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할 것, 넷째는 전쟁에 다다라서는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만 말씀하신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사(師)가 말하였다.“육재일(六齋日)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안되니, 말, 소, 닭, 개를 말하며,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꼭 필요한 것만 죽이고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다. 이것은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실천하여 감히 명을 실추시키지 않겠습니다!” 하였다.진평왕 건복(建福) 19년 임술(진평왕 24년: 602)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아막성(阿莫城)<막(莫)자는 모(暮)로도 썼다.>을 포위하니, 왕이 장군 파진간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 급간 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함께 소감직(少監職)으로 전선에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가로 물러가 군대를 숨겨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올 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일어나 갈고리로 [무은을] 잡아당겨 떨어뜨리었다. 귀산이 큰소리로 외치기를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선비는 전쟁에 다달아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달아나겠는가!” 하며 적 수십 인을 격살하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태워 보낸 다음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니 모든 군사가 [이것을] 보고 용감히 공격하였다. 적의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도 온몸에 칼을 맞아 중로(中路)에서 죽었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체 앞에 나가 통곡하고 예(禮)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귀산에게는 관등 나마를, 추항에게는 대사(大舍)를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해론 : 해론(奚論)은 모량(牟梁)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찬덕(讚德)은 용감한 뜻과 뛰어난 절개를 가져 당시에 이름이 높았다. 건복(建福) 27년 경오년(진평왕 32년: 610)에 진평대왕이 그를 가잠성(岑城) 현령으로 선발하였다. 다음 해 신미년(611) 겨울 10월에 백제에서 대군을 출동시켜 가잠성을 공격하여 100여 일이 지나자 진평왕은 장수에게 명하여 상주, 하주, 신주(新州)의 군사로써 이를 구하게 하였다. 드디어 도착하여 백제인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가니 찬덕이 분개하고 한탄하여 병졸에게 말하였다.“세 주의 군대와 장수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않고, 성이 위태로운데도 구하지 않으니 이는 의리가 없는 행동이다. 의리없이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의리 있게 죽는 것이 낫겠다.”이에 격앙되어 용감히 싸우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였는데 양식과 물이 다하자 시신을 먹고 오줌을 마시기까지 하며 힘껏 싸워 게을리 하지 않았다. 봄 정월이 되자 사람들이 이미 지쳐 성이 장차 무너지게 되어 사태를 다시 회복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이에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외쳤다.“우리 임금이 나에게 하나의 성을 맡겼는데 이를 온전하게 지키지 못하고 적에게 패하니 원컨대 죽어서 큰 귀신이 되어 백제인을 다 물어 죽여 이 성을 되찾게 하겠다!” 그리고는 팔뚝을 걷어 부치고 눈을 부릅 뜨고 달려 느티나무에 부딛혀 죽었다. 이에 성이 함락되고 군사가 모두 항복하였다.해론은 나이가 20여 세 때 아버지 공으로 대나마가 되었다. 건복 35년(진평왕 40년: 618) 무인에 왕이 해론을 금산(金山) 당주(幢主)에 임명하여 한산주 도독 변품(邊品)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잠성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니 백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내어 이 곳으로 보냈다. 해론 등이 이를 맞아 칼날이 서로 맞닿자 해론이 여러 장수에게 말하기를 “전일 나의 아버지가 이 곳에서 숨을 거두시었는데 내 지금 이곳에서 백제인과 싸우니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하고는 드디어 짧은 칼을 가지고 적에 다달아 몇 명을 죽이고 죽었다. 왕이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그 가족을 돕기를 매우 후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장가(長歌)를 지어 조문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실혜 : 실혜(實兮)는 대사(大舍) 순덕(純德)의 아들이다. 성격이 강직해 의가 아닌 것으로는 굽힐 수 없었다. 진평왕 때 상사인(上舍人)이 되었는데, 그때 하사인(下舍人) 진제(珍堤)는 그 사람됨이 아첨을 잘해 왕의 총애를 받았다. 비록 실혜와 동료였으나 일을 하면서 서로 옳고 그름을 따질 때면 실혜는 바름을 지켜 구차스럽지 않았다. 진제가 질투하고 원한을 품어 왕에게 여러 번 참소했다. “실혜는 지혜가 없고 담력만 있어 기뻐하고 성냄이 급하며 비록 대왕의 말이라도 그 뜻에 안 맞으면 분함을 누르지 못하니 만약 이를 벌주어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어찌 지방으로 좌천시키지 않습니까. 그가 굴복함을 기다린 다음에 등용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영림(=林)의 관리로 좌천시켰다. 어떤 사람이 실혜에게 말했다. “자네는 할아버지 때부터 충성과 재상이 될만한 자질이 세상에 소문이 났는데 지금 아첨하는 신하의 참소와 훼방을 받아 죽령 밖 먼 벼슬로 후미진 시골에 가게 되었으니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어찌 직언으로 스스로를 변명하지 않는가”. 실혜가 대답했다.“옛날 굴원(屈原)은 외롭고 곧았으나 초에서 배척돼 쫒겨 났으며, 이사(李斯)는 충성을 다했으나 진(秦)에서 극형을 받았습니다. 아첨하는 신하가 임금을 미혹케 하고 충성스러운 자가 배척을 받는 것은 옛날도 그랬습니다.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드디어 말하지 않고 가면서 장가(長歌)를 지어 자기 뜻을 드러냈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검군 열전 : 검군(劍君)은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진평왕 49: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였으므로 다음 해의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웠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倉)의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들이 말하기를 “뭇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홀로 물리치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만약 양이 적다고 여긴다면 청컨대 더 주겠다!” 하였다. 검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近郞)의 문도(門徒)에 이름을 붙여 두고 화랑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당시 이찬 대일(大日)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렀으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검군이 나와 근랑의 문 앞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하여 드디어 불렀다. 검군이 자기를 모살할 계획을 알았으므로 근랑과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는 서로 다시 만날 수 없다.” 하였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은 말하지 않았다. 두세 번 거듭 물으니 이에 그 이유를 대략 말하였다. 근랑이 “어찌 담당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라고 말하니 검군이 말하기를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뭇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굽고 나는 곧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가는 것은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다.” 하고, 드디어 모임 장소에 갔다. 여러 사인들이 술을 차려 놓고 사죄하였다. 몰래 약을 음식에 섞었는데 검군이 이를 알고도 꿋꿋하게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泰山)을 기러기털[鴻毛]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눌최 : 눌최(訥崔)는 사량 사람으로 대나마 도비(都非)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建福) 41년 갑신(진평왕 46: 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내침하여 군사를 나눠 속함(速含)[현재의 경남 함양군], 앵잠(櫻岑), 기잠(岑), 봉잠(烽岑), 기현(旗懸), 혈책(穴柵)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에게 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5군이] 이미 도착하여 백제 군사가 진영을 갖춘 것이 당당함을 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못하였다. 어느 사람이 주장하였다.“대왕께서 5군을 여러 장군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 병가(兵家)의 말에 ‘승리가 판단되면 진격하고, 어려울 것 같으면 후퇴하라.’ 하였으니 지금 강적이 앞에 있으니 계략을 쓰지 않고 직진하였다가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명을 받아 출동하였으므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보다 앞서 국가에서 노진(奴珍) 등 여섯 성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는데 드디어 그 곳에 성을 다 쌓고 돌아왔다. 이에 백제의 침공이 더욱 급박하여져 속함, 기잠, 혈책의 세 성이 함락되거나 또는 항복하였다. 눌최가 남은 세 성으로써 굳게 지키다가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병졸에게 말하였다. “봄날의 따뜻한 기운에는 모든 초목이 꽃을 피우지만 추위가 닥치면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늦게 낙엽진다.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다. 지금이 바로 진실로 뜻있는 병사와 의로운 사람이 절조를 다 바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병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 때 군사들이 거의 다 죽고 몇 사람 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구차히 살아 보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눌최에게 종이 한 명 있었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느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특이한 재주를 가지면 해롭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이 종을 마땅히 멀리하라!” 하였다. 그러나 눌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에 성이 함락되어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은 활을 당기어 화살을 끼워 눌최의 앞에서 쏘는데 빗나가는 바가 없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어느 적군 한 명이 뒤에서 와서 도끼로 눌최를 쳐 눌최가 쓰러지니 종이 돌아서서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고 눌최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설씨녀 : 설씨녀(薛氏女)는 율리(栗里)의 평민 집 여자였다. 비록 빈한하고 외로운 집안이었으나 용모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잘 닦아졌다. 보는 사람들이 그 고움을 흠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감히 가까이 하지 못했다. 진평왕 때 그 아버지는 나이가 많았으나 정곡(正谷)으로 국방을 지키는 수자리 당번을 가야 하였는데 그 딸은 아버지가 병으로 쇠약하여졌으므로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었고 또 자신은 여자의 몸이라서 아버지 대신 갈 수도 없었으므로 한갓 근심과 고민을 하고 있었다. 사량부 소년 가실(嘉實)은 비록 집이 대단히 가난하였으나 뜻을 키움이 곧은 남자였다. 일찍이 설씨를 좋아하였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하다가 아버지가 늙은 나이에 군대에 나가야 함을 설씨가 걱정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설씨에게 청하여 말하였다.“저는 비록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뜻과 기개를 자부하였습니다. 원컨대 이 몸으로 아버지의 일을 대신케 하여 주시오!”설씨가 대단히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이를 고하니 아버지가 그를 불러 보고 말하였다.“듣건대 이 늙은이가 가야 할 일을 그대가 대신하여 주겠다 하니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소! 보답할 바를 생각하여 보니, 만약 그대가 우리 딸이 어리석고 가난하다고 버리지 않는다면 어린 딸자식을 주어 그대의 수발을 받들도록 하겠소.”가실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랄 수는 없었어도 이는 저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가 혼인 날을 청하니 설씨가 말하였다.“혼인은 인간의 큰 일인데 갑작스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이미 마음으로 허락하였으니 이는 죽어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가 수자리에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잡아 예를 올려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이에 거울을 둘로 쪼개어 각각 한 쪽씩 갖고 “이는 신표로 삼는 것이니 후일 합쳐 봅시다!” 하였다. 가실이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설씨에게 말하였다.“이는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후에 반드시 쓰임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떠나면 이를 기를 사람이 없으니 청컨대 이를 두고 쓰시오!”드디어 작별을 하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 변고가 있어 다른 사람으로 교대를 시키지 못하여 어언 6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말하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지금 이미 그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 하겠다.” 하니 설씨가 말하였다.“지난 번에 아버지를 편안히 하여 드리기 위해 가실과 굳게 약속하였습니다. 가실이 이를 믿고 군대에 나가 몇 년동안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이 심할 것이고, 더구나 적지에 가까이 근무함에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여 마치 호랑이 입 앞에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항상 물릴까 걱정할 것인데 신의를 버리고 한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찌 인정이리요? 끝내 아버지 명을 좇을 수 없으니 청컨대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 아버지는 늙고 늙어 그 딸이 장성하였는데도 짝을 짓지 못하였다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고 동네 사람과 몰래 혼인을 약속하였다. 결혼 날이 되자 그 사람을 끌어들이니 설씨가 굳게 거절하여 몰래 도망을 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두고 간 말을 쳐다보면서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마침 가실이 교대되어 왔다. 모습이 마른 나무처럼 야위었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앞에 나아가 깨진 거울 한 쪽을 던지니 설씨가 이를 주워 들고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와 집안 사람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다. 드디어 후일 서로 함께 결혼을 언약하여 해로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설계두 : 설계두(薛頭)<어떤 책에는 설(薛)을 살(薩)로도 썼다>도 신라 의관자손이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 뜻을 말하는데 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라에서 사람을 등용하는 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가 없다. 나는 원컨대 서쪽 중국[中華國]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런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 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면 만족하겠다”. 무덕(武德) 4년 신사(진평왕 43년. 621)에 몰래 바다 배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삼국사기 권 제45(열전 제5) 김후직 : 김후직(金后稷)은 지증왕 증손(曾孫)이다. 진평대왕을 섬겨 이찬이 되고 병부령(兵部令)에 전임되었다. 대왕이 자못 사냥을 좋아하므로 후직이 간했다. “옛날의 임금은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되 깊고 멀리 생각하고, 좌우에 있는 바른 선비들의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면서,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하게 놀기를 즐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야 덕스러운 정치가 깨끗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미친 사냥꾼과 더불어 매와 개를 풀어 꿩과 토끼들을 쫓아 산과 들을 달리어 스스로 그치시지 못합니다. 노자(老子)는 「말 달리며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고 밖으로 사냥을 일삼으면, 그 중의 하나가 있어도 혹 망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보면, 안으로 마음을 방탕히 하면 밖으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니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유념하십시오.” 왕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또 간절히 간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후에 후직이 병들어 죽을 즈음에, 그 세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남의 신하가 되어 능히 임금의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구하지 못하였다. 아마 대왕이 놀이를 그치지 아니하면 패망에 이를 것이니,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바이다. 내가 비록 죽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깨우쳐 주려 생각하니 모름지기 내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는 길 가에 묻으라!” 아들들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후일에 왕이 출행하여 반쯤 갔을 때 소리가 먼 데서 나는데 “가지 마시오!” 하는 것 같았다. 왕이 돌아보며 “소리가 어디서 나는가?” 물으니, 시종하던 사람이 고하기를 “저 것이 이찬 후직의 무덤입니다.” 하고, 후직이 죽을 때 한 말을 얘기했다. 대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기를 “그대의 충성스러운 간함은 죽은 후에도 잊지 않았으니, 나를 사랑함이 깊도다. 만일 끝내 고치지 아니하면 살아서나 죽어서나 무슨 낯을 들겠는가?” 하고, 마침내 종신토록 다시는 사냥을 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선덕왕 : 선덕왕(善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덕만(德曼)이고 진평왕 맏딸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칭호를 올렸다. 앞 임금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꽃씨를 덕만에게 보였더니, 덕만이 말하였다. “이 꽃은 비록 매우 아름답기는 하나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덕만이] 대답하였다.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가 뛰어나게 아름다우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그것을 심으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이름이 덕만(德曼)이다.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麻耶夫人) 김씨다. 성골(聖骨) 남자가 씨가 마르므로 여왕이 즉위했다. 왕의 배필은 음(飮) 갈문왕(葛文王)이다. 인평(仁平) 갑오년에 즉위해 14년간 다스렸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제1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 만<萬>으로도 쓴다)는 시호(諡號)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다. 성(姓)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이름이 승만(勝曼)이다. 김씨다. 아버지는 진평왕 동생인 국기안(國其安) 갈문왕(葛文王)이며 어머니는 아니부인(阿尼夫人) 박씨다. 奴追□□□ 갈문왕(葛文王)의 딸인데 월명(月明)이라고도 하지만 잘못이다. 정미년에 즉위해 7년 동안 다스렸다. 대화(大和) 술신(戊申) 6년이다. 이상을 중고(中古)라고 하며 성골(聖骨)이다. 이하를 하고(下古)라 하며 진골(眞骨)이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비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니 시호는 문명왕후(文明王后)인데 유신(庾信)의 동생이다. 어릴 적 이름은 문희(文熙)다. 갑인년에 즉위해 7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무왕 : 3년(602) 가을 8월에 왕은 군사를 출동해 신라 아막성(阿莫城)<모산성(母山城)이라고도 한다>을 포위했다. 신라왕 진평(眞平)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막아 싸우니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성(小陀城), 외석성(畏石城), 천산성(泉山城), 옹잠성(甕岑城)의 네 성을 쌓고 우리 강토를 가까이 쳐들어 왔다. 왕이 노하여 좌평 해수(解讐)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 네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乾品)과 무은(武殷)이 무리를 거느리고 막아 싸웠다. 해수는 불리하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泉山) 서쪽의 큰 진펄 가운데로 퇴각하여 군사를 매복하여 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서 갑옷 입은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큰 진펄에 이르자 매복한 군사들이 일어나 급히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병사들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무은의 아들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군사는 마땅히 싸움터에서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도망쳐 물러나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는가!” [귀산은]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즉시 소장(小將) 추항(項)과 더불어 창을 휘두르며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것을 보고 더욱 분발하니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해수는 겨우 죽음을 면하여 한 필의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무왕 : 28년(627) 가을 7월에 왕은 장군 사걸(沙乞)에게 명령하여 신라의 서쪽 변경의 두 성을 함락하고 남녀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신라가 빼앗은 땅을 회복하려고 크게 군대를 일으켜 웅진(熊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신라 왕 진평(眞平)이 이를 듣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위급함을 고하였다. 왕이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가을 8월에 왕의 조카 복신(福信)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태종은 [백제가] 신라와 대대로 원수가 되어 서로 빈번히 침략·토벌한다라고 하면서 왕에게 조서[璽書]를 내려 말하였다. 『왕이 대대로 군장(君長)이 되어 동쪽 번병[東蕃]을 위무하고 있다. 바다 귀퉁이[海隅]가 멀고멀며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지만 충성이 지극하여 조공이 서로 잇따르고, 더욱이 [경의] 아름다운 꾀를 생각하니 심히 기쁘고 위로가 되도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寵命]을 받들어 강토에 군림하고 정도(正道)를 넓히려고 생각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기르며, 배와 수레가 통하는 곳과 바람과 비가 미치는 곳마다 천성과 천명[性命]을 이루어 모두로 하여금 또한 평안하게 하고 있다.신라 왕 김진평(金眞平)은 짐의 번국의 신하요 왕의 이웃 나라인데 매번 들으니 군사를 보내 정벌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군사를 믿고 잔인한 일을 행하는 것은 바라는 바에 매우 어긋나는 일이다.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신라의 사신에 대해 함께 조칙을 내려 화해하도록 하여 모두 화목하겠끔 하였다. 왕은 반드시 지난날의 원한을 모름지기 잊고 짐의 본 뜻을 알아서 이웃 나라와의 정을 함께 돈독히 하고 즉시 싸움을 그치라.』왕은 이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비록 겉으로는 명령에 순종한다고 하였지만 속으로는 실제로 서로 원수짐이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악 : 회악(會樂)과 신열악(辛熱樂)은 유리왕 때 지었고, 돌아악(突阿樂)은 탈해왕 때 지었으며, 지아악(枝兒樂)은 파사왕 때 지었다. 사내악(思內樂)<사내(思內)는 시뇌(詩惱)라고도 한다>은 나해왕 때 지었고, 가무(舞)는 나밀왕(奈密王) 때 지었으며,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 때 지었다. 대악(樂)은 자비왕 때 사람 백결선생(百結先生)이 지었으며, 우인(引)은 지대로왕(智大路王) 때 사람 천상욱개자(川上郁皆子)가 만들었다. 미지악(美知樂)은 법흥왕 때 지었고, 도령가(徒領歌)는 진흥왕 때 지었으며, 날현인(捺絃引)은 진평왕 때 사람인 담수(淡水)가 지었고, 사내기물악(思內奇物樂)은 원랑도(原郞徒)가 지었다. 내지(內知)는 일상군(日上郡) 음악이고, 백실(白實)은 압량군(押梁郡) 음악이며, 덕사내(德思內)는 하서군(河西郡) 음악이다. 석남사내(石南思內)는 도동벌군(道同伐郡) 음악이고, 사중(祀中)은 북외군(北郡) 음악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 기쁘고 즐거운 까닭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러나 악기의 수효와 가무의 모습은 후세에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기(古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紀異) 제1 도화녀(桃花女) 비형랑(鼻荊郞) : 제25대 사륜왕(四輪王)은 시호(諡號)가 진지대왕(眞智大王)이니, 성(姓)은 김씨(金氏)다. 왕비(王妃)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 고본古本에는 11년 기해己亥라고 했는데 이는 잘못이다)에 왕위(王位)에 올랐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럽자 나랏사람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이보다 먼저 사량부(沙梁部)의 어떤 민가(民家)의 여자 하나가 얼굴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 사람들은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욕심을 채우고자 하니 여인은 말한다. "여자가 지켜야 하는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데도 남에게 시집가는 일은 비록 만승(萬乘)의 위엄을 가지고도 맘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한다.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차라리 거리에서 베임을 당하더라도 딴 데로 가는 일은 원치 않습니다." 왕은 희롱으로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 "되겠습니다." 왕은 그를 놓아 보냈다. 이 해에 왕은 폐위되고 죽었는데 그 후 2년 만에 도화랑(桃花郞) 남편 또한 죽었다. 10일이 지난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왕은 평시(平時)와 같이 여인의 방에 들어와 말한다. "네가 옛날에 허락한 말이 있지 않느냐. 지금은 네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 여인이 쉽게 허락하지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는 말하기를, "임금의 말씀인데 어떻게 피할 수가 있겠느냐"하고 딸을 왕이 있는 방에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는 동안 오색(五色) 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는 방안에 가득하였다. 7일 뒤에 왕이 갑자기 사라졌으나 여인은 이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하는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진평대왕(眞平大王)이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아이를 궁중에 데려다가 길렀다. 15세가 되어 집사(執事)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비형(鼻荊)은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놀곤 하였다. 왕은 용사(勇士) 50명을 시켜서 지키도록 했으나 그는 언제나 월성(月城)을 날아 넘어가서 서쪽 황천(荒天) 언덕 위에 가서는 귀신들을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용사(勇士)들이 숲 속에 엎드려서 엿보았더니 귀신의 무리들이 여러 절에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져 가 버리면 비형랑(鼻荊郞)도 또한 집으로 돌아왔다. 용사들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비형을 불러서 말했다. "네가 귀신들을 데리고 논다니 그게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그 귀신의 무리들을 데리고 신원사(神元寺) 북쪽 개천(신중사神衆寺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이것을 황천荒天 동쪽 심거深渠라고도 한다)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은 명을 받아 귀신의 무리들을 시켜서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했다. 왕은 또 물었다. "그들 귀신들 중에서 사람으로 출현(出現)해서 조정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사온데 가히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그러면 데리고 오도록 하라." 이튿날 그를 데리고 와서 왕께 뵈니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는 과연 충성스럽고 정직하기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각간(角干) 임종(林宗)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왕은 명령하여 길달(吉達)을 그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은 길달(吉達)을 시켜 흥륜사(興輪寺) 남쪽에 문루(門樓)를 세우게 했다. 그리고 밤마다 그 문루(門樓) 위에 가서 자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 문루를 길달문(吉達門)이라고 했다. 어느 날 길달(吉達)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해 갔다. 이에 비형은 귀신을 무리를 시켜서 잡아 죽였다. 이 때문에 귀신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글을 지어 말했다. 성제(聖帝)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鼻荊郞)의 집이 바로 그곳일세.날고 뛰는 모든 귀신의 무리, 이곳에는 아예 머물지 말라. 향속(鄕俗)에 이 글을 써 붙여 귀신을 물리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천사옥대(天賜玉帶) : 제26대 백정왕(白淨王)은 시호(諡號)가 진평대왕(眞平大王)이며 성(姓)은 김씨(金氏)다. 대건(大建) 11년 기해(己亥; 579) 8월에 즉위했다. 신장(身長)이 11척이나 되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는데 왕王이 창건創建한 것이다)에 거동하여 섬돌을 밟자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왕이 좌우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뒷 세상 사람들이 보도록 하라.” 이것이 바로 성 안에 있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않는 돌의 하나다. 왕이 즉위한 원년(元年) 천사(天使)가 대궐 뜰에 내려와 왕에게 말한다. "상제(上帝)께서 내게 명하여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꿇어앉아 친히 이것을 받으니 하늘로 올라갔다. 교사(郊社)나 종묘(宗廟)의 큰 제사 때에는 언제나 이것을 띠었다. 그 후에 고려왕(高麗王)이 신라를 치려 하여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게 무엇 무엇이냐." 좌우가 대답한다. "황룡사(皇龍寺)의 장육존상(丈六尊像)이 그 첫째요, 그 절에 있는 구층탑(九層塔)이 그 둘째요,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가 그 셋째입니다." 이 말을 듣고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고 찬(讚)하여 말했다."구름밖에 하늘이 주신 긴 옥대(玉帶)는, 임금의 곤룡포(袞龍袍)에 알맞게 둘려 있네.우리 임금 이제부터 몸 더욱 무거우니, 이 다음날엔 쇠로 섬돌을 만들 것이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2 원성대왕(元聖大王) : 정원(貞元) 2년 병인(丙寅; 786)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紀>를 보면 제55대 왕 문덕文德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인 듯하다. 그 밖에 문경文慶은 없다. 어떤 책에는 이 왕王의 태자太子라고 했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다가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물리고 금(金) 50냥을 사자(使者)에게 주어 보내서 피리를 달라고 청하므로 왕이 사자에게 일렀다. "나는 들으니 상대(上代) 진평왕(眞平王) 때에 그 피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듬해 7월 7일에 다시 사자를 보내어 금 1,000냥을 가지고 와서 청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 신비로운 물건을 보기만 하고 그대로 돌려보내겠습니다"하였다. 왕은 먼저와 같은 대답으로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은(銀) 3,000냥을 그 사자에게 주고, 보내 온 금은 돌려주고 받지 않았다. 8월에 사자가 돌아가자 그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간수해 두었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고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角干)이니,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 끝누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장육(丈六) : 이 장륙존상을 황룡사에 모셨더니 그 이듬해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내려 땅이 한 자나 젖었으니, 이것은 대왕(大王)이 승하할 조짐이었다. 혹은 불상이 진평왕(眞平王) 때에 이루어졌다고 하나 이것은 그릇된 말이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 탑을 세운 뒤에 천하가 형통하고 삼한(三韓)이 통일되었으니 어찌 탑의 영험이 아니겠는가. 그 뒤에 고려왕이 신라를 칠 계획을 하다가 말했다. "신라에는 세 가지 보배가 있어 침범할 수 없다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룡사(皇龍寺)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진평왕(眞平王)의 천사옥대(天賜玉帶)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고려왕은 그 침범할 계획을 그만두었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塔像) 제4 사불산(四佛山), 굴불산(掘佛山), 만불산(萬佛山) : 죽령(竹嶺) 동쪽 100리쯤 되는 곳에 우뚝 솟은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9년(587) 갑신(甲申)에 갑자기 사면이 한 길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사방여래(四方如來)의 상(像)을 새기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싸여 있었는데 하늘에서 그 산마루에 떨어진 것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서 그 돌을 쳐다보고 나서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고 했다. 여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으나 연경(蓮經)을 외는 중을 청해다가 이 절을 맡겨 공석(供石)을 깨끗이 쓸고 향화(香火)를 끊이지 않았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 하고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그 절의 중이 죽어 장사지냈더니 무덤 위에 연꽃이 피었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意解) 제5 이혜동진(二惠同塵) : 중 혜숙(惠宿)이 화랑(花郞)인 호세랑(好世郞)의 무리 중에서 자취를 감추자 호세랑은 이미 황권(黃卷)에서 이름을 지워 버리니 혜숙은 적선촌(赤善村;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村이 있다)에 숨어서 산 지가 20여 년이나 되었다. 그때 국선(國仙) 구참공(瞿참公)이 일찍이 적선촌 들에 가서 하루 동안 사냥을 하자 혜숙이 길가에 나가서 말고삐를 잡고 청했다. "용승(庸僧)도 또한 따라가기를 원하옵는데 어떻겠습니까." 공이 허락하자, 그는 이리저리 뛰고 달려서 옷을 벗어부치고 서로 앞을 다투니 공이 보고 기뻐했다. 앉아 쉬면서 피로를 풀고 고기를 굽고 삶아서 서로 먹기를 권하는데 혜숙도 같이 먹으면서 조금도 미워하는 빛이 없더니, 이윽고 공의 앞에 나가서 말했다. "지금 맛있고 싱싱한 고기가 여기 있으니 좀더 드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이 좋다고 말하니, 혜숙이 사람을 물리치고 자기 다리 살을 베어서 소반에 올려 놓아 바치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공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느냐." 혜숙이 말했다.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에 공은 어진 사람이어서 능히 자기 몸을 미루어 물건에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공이 좋아하는 것을 살펴보니, 오직 죽이는 것만을 몹시 즐겨해서 짐승을 죽여 자기 몸만 봉양할 뿐이니 어찌 어진 사람이나 군자가 할 일이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무리가 아닙니다." 말하고 드디어 옷을 뿌리치고 가버렸다. 공이 크게 부끄러워하여 혜숙이 먹던 것을 보니 소반 위의 고기가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공이 몹시 이상히 여겨 돌아와 조정에 아뢰니 진평왕(眞平王)이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를 맞아오게 하니 혜숙이 여자의 침상에 누워서 자는 것을 보고 중사(中使)는 이것을 더럽게 여겨 그대로 돌아갔다. 그런데 7, 8리쯤 가다가 도중에서 혜숙을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니 혜숙이 대답한다. "성 안에 있는 시주(施主)집에 가서, 칠일재(七日齋)를 마치고 오는 길이오." 중사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니 또 사람을 보내어서 그 시주집을 조사해 보니 그 일이 과연 사실이었다. 얼마 안 되어 혜숙이 갑자기 죽자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 혹은 형현형峴이라고도 함) 동쪽에 장사지냈는데, 그때 마을 사람으로서 이현 서쪽에서 오는 이가 있었다. 그는 도중에서 혜숙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곳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다른 지방으로 유람하러 간다"하여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반 리(半里)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러 장사지내던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그 까닭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무덤을 헤쳐 보니 다만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安康縣)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라는 절이 있으니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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