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즉위년 :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은 창(昌)이고 성왕의 맏아들이다.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7대 위덕왕(威德王)은 이름이 창(昌)이며 명(明)이라고도 한다. 갑술년에 즉위해 44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 9년(598) [봄 2월에] 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關)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라후(周羅)가 동래(東萊)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 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 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역시 두려워하여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모(某)’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 : 백제창왕(百濟昌王) 13년(567. 위덕왕 13) 태세(太歲) 정해(丁亥)에 매형공주(妹兄公主)가 사리를 공양하다.(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註 : 이 매형공주는 공주의 이름일 수도 있으며, 일반명사로 본다면 누이동생 중에서도 맡공주라는 뜻일 수도 있다.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목탑지(木塔址) 사리공(舍利孔) 출토 사리기(舍利器) 청동 사리외함 명문 :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찰주를 세웠다. 이들(혹은 본디) 사리 2매를 묻었더니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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