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조카이자 사위인 반굴 제물 삼아 계백 이기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1.08 00:44 | 513호 18면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이 표제로 내세운 인물 중 김영윤(金令胤)의 전기는 실은 그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 김반굴(金盤屈),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김흠춘(金欽春)에 이르는 3대에 걸친 가문 이야기다. 비록 짧은 분량에 지나지 않으나, 반굴과 흠춘에 대한 생애의 몇 가지 중요한 단락을 보충한다. 김영윤에 앞서 등장하는 반굴과 흠춘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김영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角干) 흠춘(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이 됐는데 인덕이 깊고 신의가 두터워 뭇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발탁해 재상으로 삼았는데,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했다.”
김흠춘은 태종무열왕 7년(660) 가을 7월, 신라가 5만 대병을 동원해 백제를 정벌할 때에는 총사령관 김유신을 수행하는 부사령관 중 한 명으로 참전했다. 백제 영역에 들어간 신라군은 같은 달 9일, 황산 벌판에 이르러 계백(階伯)이 이끄는 이른바 백제 오천 결사대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신라군은 백제군과 네 번을 싸웠지만 모두 졌다. 이렇게 해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신라군 진영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김유신은 김흠춘을 비롯한 수뇌부를 소집해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군사들을 격발케 하자는 전법을 채택했다. 거듭된 패배에 사기를 잃은 군사들을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소위 가미가제식 자폭이었다. 용맹한 군사를 뽑아 적진에 뛰어들게 해서 혼자 싸우다 죽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군사들의 분노를 유발키로 한 것이다. 참으로 섬뜩한 작전이었다.
[아들 출전했더라면 내보냈을 것]
문제는 누구를 뽑을 것인가였다. 김유신은 극약처방을 생각했다.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솔선수범해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피붙이여야 했다. 만약 김유신의 아들이 출전했더라면, 서슴지 않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럴 만큼 김유신은 냉혹한 사령관이었다. 국가를 위해서는 아들조차 희생물로 바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66세의 노장 김유신에게 장성한 아들이라고는 오직 김삼광(金三光)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한데 삼광은 이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진영에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는 조카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반굴이었다. 부사령관 김흠춘은 김유신의 친동생이다. 김유신은 반굴을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형의 결정이라 해도, 자기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을 김영윤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자식의 도리로는 효성이 제일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충과 효가 모두 온전해진다’고 하니, 반굴이 ‘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곧 적진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이 장면을 약간 코믹하게 그렸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선 참혹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조카를 희생시킨 김유신은 또다른 부사령관으로서 좌장군인 김품일(金品日)의 아들 관장(官狀)도 성전의 제물로 삼기로 한다. 기록에 따라 관창(官昌)이라고도 하는 이 아들은 당시 겨우 열여섯 살 애송이었다.
한데 품일은 아들을 앞에 세우고는 여러 장수가 일부러 지켜보는 가운데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고는 홀로 적진에 뛰어들게 했다고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는 적고 있다. 하지만 계백이 애송이 관창을 다시 신라군영으로 살려 보내니, 이를 치욕으로 여긴 관창은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는 다시금 적진에 뛰어들어 맹렬히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김품일은 “내 아이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해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열왕 본기에 이르기를 “삼군이 이를 보고는 분기가 북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니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격발의 전법이다. 볼수록 섬뜩한 장면이다.
이 황산벌 전투는 한국사의 가장 비장한 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이 전투의 결과 백제 700년 사직이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흠춘은 형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전쟁에 참전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김수로에게서 시작하는 금관가야 직계 왕족 후손이다. 이 가문이 정착한 곳은 당시 신라 서울 금성(金城)을 구성하는 여섯 개 부 중에서도 사량부(沙梁部)다. 김흠춘과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 시대 금석문에도 등장하거니와, 거주지가 같은 사량부다. 그러니 김유신 가문은 김무력 이래 줄곧 사량부가 터전이었다.
김흠춘을 일러 김영윤 열전에는 “진평왕때 화랑이 되었다”고만 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엔 김흠춘이 역대 화랑 교단의 우두머리인 32명의 풍월주(風月主) 중 당당히 제19대 풍월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여기서 잠깐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열전 제7에 나오는 열기(裂起) 전기에 해답이 있다. 이렇다 할 내세울 가문 배경이 없는 열기는 문무왕 원년(661)에 당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평양성을 포위하자 대각간 김유신을 수행해 쌀 4000섬과 조 2만2255 섬을 당군에 수송하는 작전에 징발됐다. 하지만 마침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이라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고 고구려군까지 막아서자 행로가 막혔다. 우선 신라군은 이런 사정을 평양성 공격에 나선 당군 진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보기감(步騎監)으로 참전한 열기였다. 이에 김유신은 열기와 군사(軍師) 구근(仇近)을 비롯한 열다섯 사람을 특공대로 조직해 당군 진영에 파견했다. 열기는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이틀 만에 다시 신라군 본진으로 돌아왔다.
열기 열전은 “유신이 그들(열기와 구근)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 벼슬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직권으로 관위를 승진시킨 것이다. 한데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경주로 복귀한 김유신은 왕에게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 직위를 허락했지만 공로에 비하면 미흡하오니 사찬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라나이다”고 주청한다. 이에 문무왕은 “사찬이라는 관직은 너무 과분하지 않겠소”라고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벼슬과 녹봉은 공공의 그릇으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고 하고는 기어이 윤허를 받아내고 만다. 이를 볼 때 김유신은 냉혹한 군인이지만 노력에 대한 보상을 할 줄 아는 사령관이었다.
[반굴의 아들 영광도 전장서 장렬히 전사]
다시 반굴로 돌아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이기도 했다. 관창에 앞서 왜 반굴이 나서야만 했는지, 그 비밀이 마침내 『화랑세기』를 통해 풀린다. 19세 풍월주 흠순공(欽純公) 전의 한 대목이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들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반굴공(盤屈公)이다.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으리라.”
이것이다. 황산벌 전투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5만 신라군 중에서 반굴은 김유신에게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다. 조카이자 사위를 희생시킴으로써 그는 패배감과 위기감에 젖은 신라군을 향해 “너희들은”이라는 무언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근친혼이 흔하던 신라에서 사촌끼리의 혼인은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했다.
김반굴은 김흠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김유신의 사위로 희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김유신은 사위를 희생케 함으로써 자기 딸을 일순간에 과부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승전해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을 잃은 딸 영광은 심정이 어떠했을까. 오열하면서 냉혹한 아버지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한데 그의 자식 김영윤 또한 전장에서 장렬히 죽었으니, 그때까지 영광이 살아있었다면 또 한 번 가슴이 찢어졌을 생각을 하니 가슴 저편이 저며 온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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