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민속학 분야 독보의 위치를 구축한 도서출판 민속원 홍기원 창업주 겸 회장이 타계했다. 조문을 이튿날 받기 시작한다 해서 11일 저녁 나는 적십자병원에 차린 빈소로 조문을 갔다. 고인과는 직접 인연이 거의 없다시피 하나, 그 장남으로 민속원을 물려받아 운영 중인 홍종화 사장과는 친분이 남다른 데다, 그것이 민속원 그 자체에 대한 예의 표시라 생각한다. 저녁 약속으로 좀 늦은 시간이었으니, 빈소엔 홍 사장과 친분이 남다른 동료 출판인, 그리고 민속원과 홍 회장한테 음덕을 입은 역사학도들이 삼삼오오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방선주 박사
중앙일보 북한 전문기자 출신인 정창현 형은 어부인과 함께 왔다가, 어이된 셈인지 나를 보자마자 자리를 일어난다. 다른 일정이 있단다. "세상도 바뀌었는데, 승님도 한 자리 제대로 찾아보슈"라고 인사를 건네고 앉아 도서출판 선인 대표 윤관백,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김광운, 율 브린너를 연상케 하는 빡빡이 도서출판 학고방 대표 하운근 형 등과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 자리서 관백 형이 보도자료 비스무리한 서류 한 뭉치를 넘겨주는데 보니, 북조선실록인지 뭔지 하는 자료집 마흔권짜리를 냈다면서, 곧 출판기념회를 하니 기사 잘 써 달래서 대뜸 "또 안 팔리는 책 내는구만"하고 말았다.
앞자리에 광운 형이 앉아서인지 모르나, 갑자기 방선주 박사 근황이 궁금했다. 연세로 보아 생존해 계실까도 의심스러웠으나, 부고를 접한 적이 없으니, 적이나 궁금했으니, 그리하여 광운 형한테 방 박사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물었더니, 옆자리 있던 관백 형이 대뜸 "우리가 방 박사님 저작집 세 권 냈어. 출판기념회 내일 이화여대에서 해" 하는 거 아닌가? 엥? 무슨 소리여? 근데 왜 연락을 안줘 하는 둥의 얘기가 오가는데, 광운 형이 상지대 이사장 이만열 선생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열어준다. 보니, 이만열 선생이 내일 방 박사 출판기념회에서 참석한다는 내용이었다.
듣자니, 건강은 안 좋으신 편이지만, 내일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하신단다. 잘 됐다 싶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학술 담당하는 박상현 차장한테 출판기념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고는 현장 취재를 부탁했다. 다행히 그 시간에 특별히 중요한 일정이 없다 해서, 박 차장이 직접 현장을 갔으니, 식이 끝날 무렵 박 차장한테 카톡이 왔다. 출판기념회 소식과 방 박사 인터뷰는 내일 써서 일요일자로 내보겠단다. "다른 기자들 있더냐?" 물으니, 기자는 혼자라 해서, 그리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서 조금 전에 막 나간 기사가 다음 두 건이다. (클릭하면 기사 본문으로 연결된다.)
방선주 박사 "사료 찾았을 때 흥분은 아직도 기억나요"
첫번째 기사는 박 차장이 보낸 제목을 약간 손질했으니, '전설'이라는 말을 부러 붙여봤으니, 방 박사는 전설을 넘어 신화다. 미국 국가가기관이 소장한 한국 근현대사 자료 중 90%는 그의 손을 거쳤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일을 해낸 분이거니와, 이 분야 종사자들은 방선주라는 이름을 놓칠 수 없지만, 그런 그의 면모가 일반에는 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이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연합뉴스 기자로 입사해 문화부로 전근해 문화재와 학술을 전담하기 시작한 때가 1998년 12월 1일이었다. 그 즈음 이미 나는 방선주라는 이름을 너무 자주 접했다. 특히 근현대사 관련 논문이나 책에서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분이기에 이리 이름이 많이 나오냐 했더랬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방선주 개인사를 논급한 그 어떤 글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있는데 내 검색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언론에서도 방선주를 정리한 글이 없고, 역사학계도 마찬가지라, 방선주 방선주라고 하면서, 신화적인 인물이라고만 할 뿐, 그 어떤 누구도 이 분 생애를 정리한 것이 없었다.
당시까지 방 박사는 그가 미국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를 통해 주로 발간했거니와, 그런 까닭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체로 국편과 한림대 사람들은 잘 아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공적인 문서로 정리가 되지 않으니, 근거없는 이야기들만 떠돌아다니는 실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가 기회가 되면, 직접 방 박사를 인터뷰하고 그의 일생을 대강이라도 정리하리라 작심에 작심을 거듭한 것이다. 다만, 주된 활동무대가 미국이라,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는 한, 그의 입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때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방 박사가 입국한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이때다 싶어, 그를 만나러 갔다. 이 만남을 토대로 쓴 인터뷰 기사가 1999년 4월 15일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한 다음이다.
<인터뷰>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일본인들이 흔히 우리를 가리켜 과거에만 매달린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처럼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이는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65.워싱턴 거주) 교수가 일본과의 과거청산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는 한국인을 꼬집어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말이다.
15일 1주일 남짓한 한국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이 말을 잊지 않았다.
민족이나 국가,더 좁혀 가족사를 알아야 하며 이를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이런 신념이 어쩌면 방교수를 마오쩌뚱의 홍역 기록까지 소장하고 있다는 서울운동장 16배 크기의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의회도서관 서고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 문서를 거의 다 파괴해 버렸고 미군정이나 한국전쟁 관련 사료는 대부분 미국에 있어요. 국내에 남아있는 자료가 절대부족인 상황에서 미국 자료발굴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일제시기나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도 증언집이 통 나오지 않고 있어요.증언 채록과 기록집 발간은 개인 연구자나 특정 연구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만큼 정부차원에서 나서야 해요.
일본을 보세요.일본은 이미 60년대에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중인 일본관련 자료들을 정부가 전부 복사해 갔고 태평양전쟁 관련 증언집만 100권이 넘어요.반면 우리를 보세요. 제대로 된 증언집이 몇권이나 됩니까".
일반인에게 방선주라는 이름이 아직 낯설지만 한국 근.현대사,특히 미군정이나 한국전쟁을 공부하는 국내.외 학자치고 그가 발굴,정리한 자료집을 인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그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신화적 인물이다.
한국전쟁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나 일본의 와다 하루키도 방교수가 발굴한 사료에 절대의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한국과 관련된 사료수집에 헌신하게 된 것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방교수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추적하다 보면 마친 굴절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일제치하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나 선교사인 아버지 방지일 목사를 따라 중국에서 가서 22살까지 그곳에서 보냈고 1956년 반동분자로 몰려 중국에서 추방된 뒤 한국에 돌아와 숭실대와 고려대에서 한국고대사로 석사학위를 따고는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 미국 가서 먹고 살기 위해 별짓 다 했어요.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중국 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그때 갑골학에 심취했는데 아직까지 갑골학에 대해 저만큼 아는 사람은 국내에는 아마 없을 거에요".
이처럼 한-중 고대사로 출발한 그는 능통한 중국어와 일본어,영어 실력을 십분발휘하며 70년대 이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로 연구분야를 옮기게 된다.
"당시 문서보관소에서 나한테만 특별히 개인복사기를 안에다 설치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처음 미국사람들이 제가 미국에 이로운 공부만 하는 줄 알았나봐요.나중에 그런게 아닌 줄 알았지만요.내 자료집을 보고 문서보관소를 들락거리던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 미국을 해롭게 한다고 해서 출입금지를 당했지요".
이렇게 해서 방선주라는 개인이 미국립문서보관서나 의회도서관 같은 곳에서 발굴해 복사한 자료가 대락 150만건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이를 정리해 한림대나 국가보훈처 등지에서 책으로 묶어져 나온 자료집만 해도 1백권 남짓.미군정 자료집이니 한국전쟁 당시의 피로 물든 빨찌산 자료집이니 미국 독립운동사자료집 하는 따위가 모두 방교수가 발굴한 것이다.
그는 한국 관련 사료를 뒤지다 간간이 출현하는 위안부 관련 자료도 빠짐없이 정리해 글을 발표하곤 했다. 이 분야 연구를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그나마 체면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방교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쎄, 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왜 내가 사료발굴에 열성적으로 매달리게 됐는지 물어보더군요. 그때마다 전 이렇게 대답해요.진실을 알기 위해서라고. 아마 제가 힘이 있는 한 한국사 관련 사료발굴은 계속 할 겁니다".
그러나 이젠 자료나 사료발굴보다 글을 쓰는데 힘쓸 작정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올해안 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전쟁사」와 「한국전쟁사전」 편찬 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요".
키 167㎝ 가량에 몸무게는 60㎏이 될까말까한 깡마른 체구,뿔테 안경과 좋지 않은 청각 때문에 보청기를 낀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이 거인에게 이제 그 흔한 국가 서훈으로나마 그 노력을 보상할 때가 된 것이다.
taeshik@yonhapnews.co.kr(끝)
이후 방 박사를 정리한 박스 기사 하나를 별건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으니, 앞 기사에서 언급한 훈장 수여를 거부한 그가 2007년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는 입국한 그를 만나러 일부러 현장을 갔으니, 다음 기사가 이를 계기로 작성한 것이다. 송고시점은 2007년 4월 4일이다.
<NARA 터줏대감 방선주 박사>
부친 방지일 목사 이어 부자 '국민훈장'
한국근현대사 자료집만 150만건 300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99년 무렵 국내 근현대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73. 워싱턴 거주) 박사에 대한 국가서훈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근현대사 자료정리에 기여한 그의 지대한 공로 때문이다. 하지만 방 박사는 "훈장 받으려 한 일이 아니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런 그가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난달 7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교육인적자원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2006년도 국민교육발전 유공자들에 대한 국민훈장 수여식에 방 박사는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에 비춰볼 때 이날 국민훈장 수훈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 달이 가까워 오는 데도 관련 학계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방 박사의 부친은 올해 97세인 방지일 목사. 9년 전인 1998년에는 방 목사가 이미 기독교계 대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므로 부자가 국민훈장을 받은 드문 기록도 세운 셈이다.
그에 대한 국민훈장 서훈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추진했다. 건국대 신복룡 교수를 필두로 고려대 사학과 대학원 동료인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위원장, 전기호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장,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 등도 힘을 보탰다.
이런 면면들에서 방 박사가 이룩한 업적의 일단이 드러난다. 그는 한국근현대사 관련 사료의 보물창고라고 일컫는 미국국립문서기록청(NARA)의 '터줏대감'으로 불린다.
숭실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도미한 그는 1973년 워싱턴대학에서 석사학위, 1977년에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중국 서주(西周)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도 미국 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1979년 이후 NARA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직원으로 취직한 것이 아니라 자료관 일반 이용자의 한 사람으로서 NARA 직원과 같이 출근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한국근현대사와 관련한 자료조사와 수집이라는 한 우물을 파게 된다. 이후 서울 동대문운동장 16배가 된다는 자료 더미를 뒤져 복사하는 일상을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찾아낸 자료 중 정식으로 간행된 것이 올해 3월 현재 무려 300책을 헤아린다. 1999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났을 때 방 박사는 자신이 발굴한 자료가 150만 건 정도 된다고 했었다.
그가 발굴한 자료를 가장 요긴하게 이용한 저명한 연구자로는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와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가운데 그가 발굴한 자료를 이용하지 않는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습득한 이른바 '북한군노획문서'라든가 미군 측 자료, 중국군 관련 문서 등은 한국현대사를 새로 쓰게 했다. 이 외에도 광복 직후 미군정의 방대한 자료, 미국 특수부대 OSS의 관련 문건, 독도에 관한 연합군 자료, 일본군 위안부 운영과 관련한 문건 등 그가 자료를 발굴해낼 때마다 한국근현대사는 요동을 쳤다.
그가 발굴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등을 통해 간행되곤 했다.
이런 방 박사가 지금껏 갖고 있는 공식직함이라고는 국사편찬위원회 국외사료조사위원 정도 뿐이다. '돈벌이'가 안 되는 이런 활동을 위해 방 박사는 자그마한 미국 대학에 자리 잡은 부인 정금영 씨의 내조에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윤덕영 편사연구관은 "선생이 걸어온 지난 시기의 역경과 노력, 업적에 비해 이번 서훈은 뒤늦은 감이 있다"면서 "많은 연구자와 국내 자료수집기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도 이를 방관해 왔던 것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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