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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과 족보 이야기

호적에 적힌 이는 열에 한둘이라는 이야기

by 신동훈 識 2026.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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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경 준호구李潤慶準戶口. 1774년, 조선 영조 50년에 한성부에서 남부 낙선방樂善坊 왜관동계倭館洞契 제17통 제2호에 거주하는 이윤경한테 발급한 준호구 중 노비 관련 기술 부문이다. 이윤경과 그의 아내 박씨의 4대조, 그리고 함께 사는 가족 구성원과 노비 이름을 적었다. 한데 노비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문서 마지막에는 한성부 당상, 낭청, 감동관 서명이 있고 군데군데 한성부인을 찍었다. 지금 서울역사박물관 한성부 특별전에 출품 중이다.

 

本朝人口之法, 不明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民心, 因循至今, 故各道各官人口之數止此, 他道皆然。

조선왕조실록 지리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인구는 호적에 적힌 숫자가 열명에 한둘이다. 

이를 제대로 조사해서 고치려고 해도, 민심을 읽을까봐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르렀으니, 이 때문에 각도 고을 인구수가 이 모양이고, 다른 도도 전부 다 이렇다. 

이걸 그냥 읽어 보면 그럴 듯해 보인다. 한마디로 호적이 개판이라는 이야기다. 

있는 사람도 다 못 적어놨다는 이야기고, 이 이야기가 조선후기에 있었다는 백골징포 황구첨정 등의 이야기가 맞물려 

정말 그런가 보다 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시대 호적을 보면 의외로 굉장히 탄탄하다. 

물론 여기에 고의로 누락된 이도 있을 수 있고, 사실과 안 맞는 기록도 분명히 있을 터인데, 

행정력이 미치지 못했다던가, 관리의 능력이 안 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호적을 보면 그 호적에 적힌 사실이 몽땅 구라라고 해도

그건 행정력이 미치지 못한 결과가 아니라, 호적 기재를 둘러싸고 

관과 집안, 개인이 힘겨루기를 한 최종 결과라는 심증을 갖게 된다. 

한마디로 누락된 경우도 다 이유가 있고, 

당시 관이 파악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워낙 개판이다 보니 이 마을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호적이 그 모양이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필자가 호적을 짧은 경험이나마 유심히 살펴본 결과를 말씀드리자면,

그게 아니고 호적은 엉터리 기록조차 뒷배경 스토리 없는 경우는 하나도 없고, 

기록의 누락조차 관에서는 이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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