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고고학도3 우리는 모두 사회초년생이었다! - 1999년 겨울, 노변동 유적 첫발굴현장 이야기 오늘의 병아리 대동문화재연구원 백미옥선생님 ❝1999년, 노변동의 겨울❞ 노변동 유적은 저에게 운명(?) 같은 곳이에요. 대학교 2학년, 조교실 앞에 있던 노변동유적 현장 아르바이트 구함 공지를 보고 우연히 찾아 갔고, 첫아르바이트•첫발굴경험을 하면서 지금까지 발을 못 빼고 있는 걸 보면요. 1999년 겨울, 저의 병아리시절 이야기 들어 보실래요?:) **아래 글은 보내온 사연입니다. 1999년 겨울, 대구 노변동 유적에서 첫발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대학교 2학년. 발굴의 발자도 모르고 오로지 친구들과 같이 있는게 좋아서 시작한 알바였어요. 현장에서의 제가 할 일은 노변동 유적에 펼쳐진 수없이 많은 석곽묘를 현장에서 실측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알바생 오빠들이 실측할 곳에 방안을 치고, 비닐.. 2022. 5. 16. 모든 고고학도는 도둑놈이다 북한군 귀순병사를 수술한 아주대병원 이국종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돈다. 그를 두고 한편에서는 영웅으로까지 칭송하는 움직임도 없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 그는 의사일 뿐이다. 그것도 요즘 의료계에서는 누구나 피한다는 외과 의사다. 듣기로 외과는 의료계 여러 부분 중에서도 힘이 들고 돈은 안 되고, 폼은 안 난다 해서 인기가 없다고 한다. 그런 시대에 소위 아덴만의 영웅을 살려내고, 그에다가 총알 몇 방을 맞았는지도 모르는 북한군 귀순병사의 목숨까지 살려냈으니, 왜 이국종을 호명하는가 생각하면, 나는 시대가 요구하는 명의名醫에 대한 열망이 있다고 본다. 명의란 무엇인가? 대중이 원하는 명의는 이미 드라마 《허준》 혹은 《김사부》가 제시했다고 본다. 명의는 돈이 아니라 인명을 위해 싸운다. 그는 위험에 빠진 .. 2021. 11. 25. "나도 참 많이 고생한 거 같아", 어느 고고학도의 일생 어제(October 26, 2017) 하루는 휴가였다. 그런 휴가에 느닷없이 익산 왕궁리로 내가 향한 까닭은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 때문이었다. 현장 자문회의가 있다 했고, 그 자문위원으로 가신다 해서 서둘러 내려갔다. 1947년(실제는 1946년 1월) 경북 영주 출생. 아버지는 육군 장교 출신으로 5.16 때 군을 떠났다. 외지 생활을 하는 아버지와는 떨어져 고향 영주 안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다가 안정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있는 부모와 같이 살고자 중앙선 야간 열차를 타고는 홀로 상경해 청량리역에 내렸다. 처음엔 영등포 신도림에 살다가 중동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문래동 적산가옥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의 주공아파트마냥 그때 문래동엔 상자로 찍어낸 듯한 적산가옥 500채.. 2018. 10. 27. 이전 1 다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