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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4

일제시대의 지식인: [21] 박헌영과 [22] 김달삼 현준혁에 이어 이제 일제시대의 좌파 지식인에 대해 써 보겠다. 남로당계와 북로당계를 나누어 쓴다. 이 두 계열은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로 교육경력의 차이를 무시 못한다. 남로당 계열에는 당시로서 고학력자가 많다. 남로당 박헌영은: 대흥보통학교 (1912-1915)-- 경성제일고보 (1915-1919) 보통학교 경력은 1년이 짧고 (당시 보통학교는 4년) 반면 고보 경력도 1년이 짧은 것 같은데 (당시 고보는 5년) 월반을 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박헌영 기록에는 경성제일고보 (뒤의 경기고)를 나왔다고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가 졸업할 때까지는 이 학교는 아직 경성고보였다. 경성제이고보(뒤의 경복고)가 생긴 후에야 경성제일고보로 이름이 바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는 경성고보가 정.. 2023. 6. 8.
아버지 박헌영 전집을 준비 중이던 20년 전의 원경 스님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 입적(종합) 양정우 / 2021-12-06 18:41:16 조계종 최고 법계 대종사·원로회의 부의장 지내…2004년 '박헌영 전집' 발간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 입적(종합)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헌영(1900∼1956)의 아들인 원경스님이 6일 입적했다. 세수 81세, 법랍 62년.조계종에 따르면 원경스님은 이날 오전 10시께 자신이 주지 k-odyssey.com 내가 한때나마 조선공산당에 관심을 표명하며 나름대로 관련 기사를 열심히 쓰던 때가 있었으니, 사회부에서 문화부로 전근한 98년 이래 2000년대 초반까지였다. 당시 나는 문화재와 더불어 학술을 전담했으니, 이 과정에서 학술 담당기자들이 접촉하는 .. 2021. 12. 6.
소위 김원봉 문제 독립운동가 중에 김원봉은 실은 뒤늦게 뛰어들었으니 대중매체에 힘입어 지하에서 부활했다. 영화가 결정적이었고 그 붐에 힘입어 국가서훈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솔솔 나오는가 싶더니 그 찬반을 두고 뜨겁다. 이 김원봉 문제를 시대변화와 더불어 우리사회가 유연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다만 이 논란은 김원봉에 그치지 아니한다는 게 심각성이 있다. 김원봉과 거의 흡사한 길을 박헌영이 걸었고 김일성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김원봉보다 박헌영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정치지향은 혹 조금 다를지 몰라도 격렬한 독립투쟁가로서 박헌영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이 부셔 이미 1920년대 초반에 조선공산당 수괴로 우뚝 섰다. 북한 정권 수립과 더불어 부수상이자 2인자로 있다가 역시 숙청된 박헌영도 서훈해야 한다. 그다음 김일성은 어찌할것.. 2019. 6. 8.
현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과 한국독립운동 이 사진에 대한 김용래 기자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호찌민, 한국인들의 저항 그대로 따라"…100년 전 프랑스 경찰 문건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20년 전후로 프랑스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지사 호찌민(전 베트남 국가주석)이 밀접하게 교류한 내용이 프랑스 정부 자료로 최초로 확인됐다. 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 씨는 프랑스 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엑상프로방스 소재)을 뒤져 1919~20년 프랑스 파리의 정보경찰관이 작성한 동향보고 문건을 발견해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사진의 문서는 프랑스의 정보경찰관 '장'이 작성한 것으로 "응우옌 아이 꾸옥(호찌민의 당시 이름)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 2018.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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