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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부흥운동5

부여경(扶餘敬/夫餘敬) 의자왕 아들로 백제 멸망 이후 당이 백제왕으로 책봉한 부여륭의 아들로, 즉천무후에 의해 백제왕에 책봉되긴 했지만, 허울뿐이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의봉(儀鳳) 연간에 (부여)륭을 웅진도독(熊津都督)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무리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하므로 융은 감히 고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고구려에 의탁하여 다스리다가 죽었다. 무후(武后)가 그의 손자 경(敬)으로 왕위를 잇게 하였으나 그 땅은 이미 신라ㆍ발해말갈(渤海靺鞨)에게 분할되어 나라의 계통이 드디어 끊기고 말았다. 2018. 3. 6.
지수신(遲受信) 백제부흥운동에 가담한 백제인으로, 임존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용삭 2년(662) 7월에…왕인 부여풍이 몸을 빼서 달아났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혹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하는데 [당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얻었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모두 항복했으나 홀로 지수신(遲受信)만이 임존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마침내 그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나고 나머지 무리도 모두 평정됐다. 삼국사기 권 제6(신라본기 제6) 문무왕 上 : 3년(663)…5월에 영묘사 문에 벼락이 쳤다. 백제의 옛 장수 복신(福.. 2018. 3. 6.
사타상여(沙陁相如) 흑지상지(黑齒常之)가 이끄는 백제부흥운동군에서 별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나중에 당군에 항복했다. 사타(沙陁)는 복성(複姓)이며, 이름이 상여인데, 아마 고대 중국 저명한 정치가 인상여(藺相如)나 전한시대 저명한 문학가인 사마상여(司馬相如)에서 따온 듯하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이보다 앞서 흑치상지(黑齒常之)가 흩어진 무리를 불러 모으니 10일 만에 돌아와 붙은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보내 쳤으나 상지가 막아 싸워 이겼다. 다시 200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은 이길 수 없었다. 상지가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陁相如)와 함께 험한 곳에 의지해 복신에게 호응하다가 이때가 되어 모두 항복했다. 인궤(仁軌)가 진심을 보이면서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나타내게 .. 2018. 3. 6.
김흠(金欽) 복신과 도침이 주도하는 백제부흥운동 진압을 위해 출동한 신라 장수. 백제군에 패하여 갈령도에서 도망쳤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신라왕 김춘추가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인궤 등을 구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맞아 쳐서 이기니 김흠이 갈령도(葛嶺道)로부터 도망하여 돌아갔고,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치 못하였다. 2018. 3. 6.
도침(道琛) 백제가 멸망하자, 무왕의 조카 복신을 도와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승려. 주류성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키고 왜국에 볼모로 간 부여풍을 맞아 왕으로 삼았다. 부흥운동이 기세를 올리자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컬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복신의 의심을 샀는지, 그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사기 권 제28(백제본기 제6) 백제부흥운동 :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렸는데 이때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찍이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옛 왕자[古王子] 부여풍(扶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서북부(西北部)가 모두 응하자 [그들은] 군사를 이끌고 인원(仁願)을 도성(都城: 사비성)에서 포위하였다.조서를 내려 유인궤를 검교대.. 2018.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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