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제시대~~의 경우" 마지막 사례이다.
양주동 선생의 예를 보겠다.
위키에는 양주동 선생에 대해
"경성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어영문학과를 나왔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
이렇게 해놓았다.
그런데 이 기술은 누락된 부분이 많다.
우선 중동고보는 앞에서 이야기 한것처럼 중학과정으로 와세다대 영문과로 바로 진학이 불가능하다.
아마 뭔가 빠진 이력이 있을 것이다.
한편 나무위키에는 "1903년 경기도 개성군에서 태어나 중동학교를 마치고 1921년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영문과로 전과하여 1928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이라고 되어 있다.
이 프로필도 누락분이 있다. 중동학교를 마치면 불문과건 영문과건 여기는 본과이기 때문에 바로 진학이 불가능하다. 뭔가 그 사이에 다른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빠진 부분은 다움백과에 보면 자세하다.
"아버지 원장과 어머니 강릉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아버지,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5~6년간 한학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를 졸업한 후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23년 잠시 귀국하여 유엽·백기만·이장희 등과 함께 〈금성〉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했다가 일제 말기에 학교가 문을 닫자 경신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렇게 보면 아귀가 맞는다.
선생은 평양고보와 중동고보를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예과"로 들어간 것이다.
대학 예과과정이 고등학교 과정이므로 평영와 중동 고보의 학력을 인정받아 간 것이다. 예과를 수료해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되었고, 이어 와세다 영문과 (본과)를 졸업했던 것이다.
이 시기가 1920년대인데, 당시로서 생업과 무관한 영문과를 일본 와세다까지 받아오기란 조선인 중에 극히 희귀했을 텐데,
앞서 언급한 이병도 선생이 보성전문 졸업후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에서 역사학 학사위를 받은 것이 1919년이었으니, 두 분 모두 집안 살림이 궁벽한 분들은 아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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