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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35) 박물관 고고학의 대부 한병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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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삼(오른쪽에서 두번째). 1984년 쾰른동아시아박물관에서 열린 한국미술오천년전 전시에 앞서 진열된 황남대총 북분 출토 금관을 살펴보고 있다. 왼쪽은 당시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한 전 관장을 수행한 이건무

 
한병삼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사람으로 적어도 지금의 한국 문화유산계에서는 무게감이 있는 역사상의 인물로 통한다.

이런 그와 나는 이렇다 할 인연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1998년 12월 정기 인사에서 내가 사회부를 떠나 문화부에 안착했을 때, 이미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장직에서 물러난 지 한참이나 지난 뒤였거니와

그에 따라 그 또한 문화재위원이라든가 발굴현장에서 지도위원 같은 자격으로 더러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럴 적에 가끔 마주치는 정도였고,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어떠한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것이 듯이, 그 또한 나에게는 퍽이나 인상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초창기 시절 내가 찍은 각종 발굴현장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2000년대 초반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가 조사한 원주 법천리 백제고분 발굴현장에 그의 모습이 보인다.

덧붙이건대 이때 법천리 발굴 담당 학예사가 외모로 보아 흡사 통일신라시대 무인상을 방불하는 윤형원이었다.

나도 더러 본 모습이지만, 각종 발굴현장에 지도위원 등의 자격으로 드러낸 그의 남다른 특징이 있으니, 우선 그는 말이 많지 않았다.

해당 발굴단이 조사한 유적 유물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 않았다.

이를 직접 조사한 조사원보다 지도위원이 더 많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신념 같은 것이 그에게는 분명히 있었다.
 

아마 중박 관장 재직시절 모습일 것이다.

 
그러면서 매양 조사단을 향해 “무엇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가”를 물었다. 그 자신이 원했건 하지 않았건, 그런 까닭에 해결사를 자임하는 일이 많았다.

발굴현장에서 조사단이 부닥치는 문제가 오죽이나 많은가? 이를 염두에 둔 자문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그런 까닭에 예컨대 모든 유적 유물에 사사건건 개입하면서 일대 장광설을 펴는 최몽룡에 견주어 조사단에서는 매우 선호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목소리가 커렁커렁했다. 키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던 듯 하지만 그 연배로는 큰 편이었으며, 몸집은 거대했다.

달변이라는 느낌까지 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눌변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 많지는 않았으되, 꼭 필요한 말한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외모 때문인지, 그리고 신선을 방불하는 온통 허연 머리카락 때문인지 연배에 견주어 뿜어내는 ‘포스’는 더한 느낌을 주곤 했다.

그는 분명 박물관에서는 적어도 고고학 분야에서는 대부와도 같은 존재였으며 그에서는 늘 이른바 주류였다.

그는 서울대에 고고인류학과가 창설되기 전에 그곳 사학과를 다닌 까닭에 체계적인 고고학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기 힘들다.

실제 자신이 직접 조사에 참여한 발굴현장은 나로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박물관 고고학의 대부로 통한다.

그를 꼭지점으로 삼는 박물관 고고학 흐름을 주요 인물로 뽑아보면 고고부장으로 재직하다가 느닷없는 창원 다호리 유적 발굴 감사 여파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암으로 타계한 한영희와 나중에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을 역임하는 이건무,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장 이영훈 등이 있다.

다호리 유적 감사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덧붙일 일화가 있다.

나중에 창녕 비봉리 발굴에서 다시 만날 테지만, 임학종 사건이다.

이 독특한 인물은 공직 부침이 극심하거니와, 그 꼬장꼬장한 성격과 장거리 여행이 힘든 신체 특징과도 관계있을지 모르겠다.

투서에서 시작했는지 어떤지 모르나, 국립박물관 고고부가 오래도록 연차 발굴을 벌인 다호리 유적 발굴에 비리 혐의가 있다 해서 문화부인지 감사원인지 감사를 받게 되었거니와, 담당 학예직들은 그야말로 불려가서 혼쭐이 났다.

그에서 한영희는 막대한 스트레스를 받거니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장래의 박물관장감이라는 평이 자자한 한영희는 유명을 달리한다.

이 한영희는 내 기억에 1999년인가 타계했으니, 나랑은 인연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 감사에서 임학종은 발굴야장을 제출했다.

한데 이 야장을 보던 감사관이 학을 떼고 말았다.

언제 어느 때 껌 한 통 구입한 기록까지 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야장을 보고 감사관이 경악하고 말았다. 

한병삼을 이쪽 업계, 특히 박물관 주변에서는 대체로 ‘경배’에 가까운 존경을 바쳤다.

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그를 홀대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인연이 없었기 때문이며, 어디까지나 나는 기자 나부랭이가 아닌가?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의아한 점은 있었으니, 내가 알기로 그가 남긴 연구업적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기야 이는 박물관에서 일하거나 일한 사람들에게서 거의 공통으로 발견되는 현상인데, 그들은 대체로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어떻게 논문까지 (많이) 쓸 수 있겠느냐고 항변하곤 한다.

나아가 이런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특징이 있으니, 말이 엄청 많아 아는 게 무지 많다는 점이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누구보다 실물을 많이 접할 기회를 지녔을 때문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런 말에 전연 찬동하지 않는다. 논문 쓰는 일과 공무원, 혹은 박물관 직원이라는 사실이 반비례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하튼 한병삼이 이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러면서도 발굴현장과 같은 회의에서 그가 뱉은 말은 다른 어떤 동석자보다 위력이 컸다는 것도 분명하다.

내가 한병삼을 마지막으로 본 곳은 2000년 한양대박물관이 발굴 중이던 경기 하남 이성산성 현장에서였다.

그 몇 달 뒤인가 갑자기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마지막 현장에서 조사단에서 마련한 스포티지 차량에서 내리는 그를 보니 거둥이 아주 좋지는 않았다.

물었더니 허리 디스크 수술 여파라 했으나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만큼이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날 이성산성 현장에서 그를 부축해 오른 이가 나중에 서강대 총장까지 하는 서강대 교수 이종욱이었다.

내가 당시 현장에서 이종욱에게 한병삼과 어떤 인연이 있냐고 물었더니 영남대에 있을 때 경주를 자주 갔는데 그때마다 그가 반갑게 맞이해 주며 당신 연구를 격려했다 한다.

그의 공직 혹은 그 주변 이력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 박물관과 더불어 문화재위원으로서의 행적이다.

그는 1985~2001년 문화재위원을 역임했다. 위원은 2년마다 새로 위촉되니 3번 거푸 역임한 셈이다.
1997~2001년에는 제6분과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무렵 문화재 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 경우 더러 문화재청과 박물관 충돌이 불가피한 일이 있기도 한다. 이때마다 그는 박물관 편을 노골적으로 들었다.

대표적으로 문화재청이 지금의 분황사 인근에 추진한 황룡사지전시관을 무산시킨 일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도 별도 기회가 있을 것이니 그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이를 무산시킨 1등 공신에 한병삼이 들어있다.

박물관 한병삼을 논할 때 또 하나 눈여겨 볼 대목이 그의 친구들이다.

그의 서울대 사학과 동기생으로 같은 박물관에 생평을 투신한 인물로 미술사학도로서 도자기 전문가인 정양모가 있고, 박물관계 대모로 통하며 최종 공직으로는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는 이난영이 있다.

이 세 사람 사이에는 묘한 라이벌 의식도 적지 않았던 듯하지만, 늘 선두주자는 한병삼이었다.

한병삼 관장 시절 정양모는 이 조직 넘버 투인 학예실장이었으며, 미술사학도인 이난영은 경주에 있었다.

한병삼이 물러난 뒤 후임 관장에는 정양모가 된다. 이 정양모 시절에 그 유명한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 사건이 있었다.

이 둘 역시 나중에 작은 코너를 마련해 살피기로 한다.

아! 이런 그가 타계한지 벌써 15년이라니. 질풍의 세월이 믿기지 않는다.

그를 추모하는 회고집 헌정식이 10주기를 맞아 그가 생평토록 봉직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있었다.

아래 첨부하는 그의 이력을 보면 알겠지만, 저 세대는 지금 학예직들이 보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젊어서 갖는 호사를 누린 것만 같다.

서른여섯에 박물관 고고과장이 되었으며, 마흔에 국립경주박물관장에 임명되어 무려 9년을 재직했으니 말이다.
 
허공虛空 한병삼 약력
1935년 평양 출생
1958년 서울대학교 사학과 졸업
1966년 일본 교토대 고고학과 연수
1961년 국립박물관 고고과
1969년 국립박물관 학예연구관
1971년 국립박물관 고고과장
1974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석학예연구관
1975~1984년 국립경주박물관장
1983~1987년 한국고고학회장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1984~2001년 아세아사학회 평의원(한국대표)
1985~1993년 국립중앙박물관장
1985~2001년 문화재위원
1996~1997년 ‘문화유산의 해’ 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
1996~2001년 문화복지기획단 위원
1997~2001년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1997~2001년 문화재청 북한문화재연구 위원장
1997~2001년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겸 제6분과 위원장
1999~2001년 동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장
2001년 3월 4일 타계 

[상훈]
1978년 홍조근정훈장
1983년 朝日學術獎勵賞 (日本)
1991년 國際交流基金賞 (日本)
1992년 第1回 雄山閣 考古學賞 (日本)
1997년 은관문화훈장 (2016.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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