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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사금갑射琴匣을 심판한다](15) 불륜 건너 간계를 들고 나온 승람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5.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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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설이 길었다.

그렇다면 이 승람에 사금갑 이야기는 어떻게 저록되어 있는가?

이 이야기는 권 제21 경상도慶尙道 중 경주부慶州府에 보인다.

나아가 저 사금갑은 사건 자체를 다루는 1부와 그에서 비롯한 세시풍속 생성 유래담의 2부로 나뉜다는 말을 했거니와,

그런 까닭인지 저 이야기는 같은 경주부 안에서도 분산 배치되어 있다. 

먼저 그 풍속 편에서는 찰밥 제사와 관련해 그 기원을 논하면서 아래와 같이 언급했으니 


신라 소지왕炤智王이 이미 금갑琴匣의 화禍를 면하자 나라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까마귀와 쥐와 용과 말과 산돼지의 공功이 아니었더라면 임금께서는 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했다.

이에 마침내 정월의 첫 자일子日·첫 진일辰日·첫 오일午日·첫 해일亥日에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않아 신일愼日[삼가는 날이라는 뜻]로 삼았다.

이날을 속언에서는 달도怛忉라 하는데, 슬퍼하고 근심하여 금기禁忌한다는 뜻이다.

또 정월 16일을 오기일烏忌日로 정하고, 찰밥으로 제사지냈다.

나라 풍속이 지금도 그렇게 한다.

 

그러면서 그 유래와 관련헤 "더 자세한 내용은 서출지書出池 주註에 보인다"고 했다. 

저에서 예고한 서출지는 고적 편에 보인다. 그에 대한 주석은 다음과 같다.


금오산[지금의 경주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에 임금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는데, 이상한 까마귀와 쥐가 있으므로 임금이 기사騎士에게 까마귀를 쫓아가게 했다.

기사가 남쪽으로 피촌避村에 이르렀을 때에 두 마리 돼지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머물러 그것을 구경하다가 홀연히 까마귀를 놓쳤다.

그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바쳤다. 겉봉에 쓰기를, “뜯어 보면 두 명이 죽고 뜯어 보지 않으면 한 명이 죽는다.” 했다.

기사가 와서 바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두 명이 죽는 것보다는 뜯지 않아서 한 명이 죽는 것이 낫다.” 했다.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두 명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함이고, 한 명이라고 한 것은 임금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기고 뜯어 보니, 씌어져 있기를, “거문고 갑匣을 쏘라.” 했다.

임금이 궁궐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았더니, 바로 내전內殿에서 분수焚修하던 중이 궁주宮主와 몰래 간통하고 간계奸計를 꾸몄던 것이다.

두 사람은 죽임을 당하였다.

그 못을 서출지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크게 보아 삼국유사 사금갑과 같다.

내전 분수승과 바람을 핀 여인을 궁주라 한 점도 같다.

나아가 사금갑 사건 자체와 그에서 비롯하는 세시풍속 유래가 잘 설명되지 않는 점도 같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는 사금갑 사건일을 정월 15일로 밝히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말하는 사금갑 이야기는 저 정월 15일만 빼고선 삼국유사 그대로라 삼국유사를 인용했다 보는 편이 옳다. 

왜 신증이 저와 관련해 더 합리적인 이야기를 담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인용하지 않았을까?

이 점이 의아스럽기 짝이 없다. 

한데 저 신증에는 세심히 쳐다볼 삼국유사와의 차이점이 정월 15일 말고 또 있다.

내전 분수승과 그의 여자 궁주가 불륜을 넘어 이를 기화로 "간계奸計를 꾸몄다"고 한 대목이 그것이다.

그 간계가 저 서출지에서 나온 예언을 토대로 하면 왕을 시해하려 하는 행위, 곧 반역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점을 신증은 느닷없이 갖자 붙여놨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에서도, 절요에서도, 통감에서도 보이지 않는 대목이다. 오직 점필재만이 한 이야기다. 

앞서 나는 신증 편찬 혹은 그 증보수정에 김종직이 관여했다는 말을 했거니와,

이는 아마도 그와 관련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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